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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단장을   마친   나는   곧장   응접실로   내려갔다.

미완성한   보고서와   연구   일지,   마법진이   그려진   화지를   가지고   방에   들어서니   대학   마탑의   정교수인   로일렌이   보였다.

공국에서   유행하는   세련된   복식(하비드가   늘   입고   다니는   테일   코트와   비슷한   것으로,   보통   정장이라고   부른다)을   입은   로일렌이   테이블   앞에   앉아   엘프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순간   엘프가   사고를   치는   게   아닐까   싶어   심장이   철렁했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자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슬금슬금   다가가니   로일렌이   자리에서   일어난   후   밝은   표정으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훤칠한   얼굴에서   건강한   중년미가   느껴졌다.

“테오라드   자작님이시군요.   예정보다   일찍   찾아뵈어   결례를   범했습니다.”

“저야말로   응대가   늦어   죄송합니다.   제   노예가   혹여   불편을   끼치진   않았는지요.”

“불편?   아하하.   농담이   심하십니다.”

로일렌이   엘프를   돌아보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엘프는   공손함을   담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정갈한   자태가   마치   잘   교육받은   메이드를   연상케   만들었다.

“부끄럽지만   이   노예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노예가   말하기를   생체   파동을   마법적인   호흡과   연관시키면   영창의   단순화가   가능하다는데,   실현   가능성은   제쳐두고서라도   발상이   무척이나   기발합니다.”

허허   웃은   로일렌이   내게   은근한   눈짓을   보낸다.   말하자면   호감어린   눈빛이었다.

“제   지식이   얼마나   미진한지   깨닫게   해주는군요.   따로   마법을   배운   겁니까?”

“노예라면   아마…….”

“노예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겸손은   그쯤   하시지요.   한낱   노예가   마법의   골자를   어떻게   논하겠습니까.   노예의   주인인   테오라드   자작님께서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이   노예가   한줌   두   줌   주워들어   제게   말해주고   있다는   걸   압니다.”

오해가   심하다.

“저는   말씀해주시는   것처럼   풍부한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제   배움은   로일렌   정교수님에   비하면   새   발의   피나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친   겸손은   독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낮추시지요.   제가   제도에서나   귀족   취급을   받지   지방에서까지   대접을   받을   인물은   아니니까요.”

웃기는   소리다.   대학   마탑의   정교수라는   직함은   제국   전역에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위치다.   정교수로   임용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황제   폐하의   허락이   있어야   하니까.

대학   마탑의   정교수를   무시하는   것은   곧   황제   폐하를   무시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   어느   귀족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으면서   나를   떠보는가.

나는   약간의   불쾌함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서로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그럴   순   없습니다.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으음.   곤란하게   해드리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일단   알겠습니다.   그보다   테오라드   자작님께서   연구하고   계시다는   ‘인공   강우’   마법의   도식화를   볼   수   있을까요?”

“아.   보고서랑   연구   일지를   우선적으로…….”

“저는   도식화를   말씀드린   겁니다.   나머지는   허례허식에   불과하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규정이라는   게   있는   것인데.   그래도   감사관의   역할로   온   사람이   달라고   하는데   싫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주섬주섬   마법   화지를   꺼내들어   로일렌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어이구.   감사합니다.”

양   손으로   마법   화지를   받아든   로일렌이   품에서   고급스런   완드를   꺼내   종이를   툭   두드렸다.   그러자   마법   화지가   붕   떠올라   양옆으로   촥   펼쳐진다.

팔   년   가까이,   지지부진했던   최근의   삼   년을   제외하더라도   오   년간의   노력을   기울여왔던   마법진이   평가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괜히   뒷목이   뻣뻣해진다.

물론   엘프를   통해   엄청난   수준의   수정을   거치긴   했지만   긴장이   되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태연함을   유지하였다.

“음?   이게   어떻게…….”

마법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로일렌이   품에서   안경을   꺼내들어   착용하였다.   그러더니   좀   더   꼼꼼하게   마법진을   살펴본다.

회로의   연결   부분과   각종   기호의   연계화력,   문양의   적합성   등을   중얼거리던   로일렌이   끝끝내   오류를   찾지   못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맙소사.”

진심으로   놀란   것인지   로일렌은   마법   화지를   접은   후   흥분을   숨기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모험가처럼   과열된   낯빛이었다.

“황실의   지원을   끊은   게   삼   년   전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정기   보고도   그즈음부터   하지   않았고요?”

“그렇습니다만.”

“제가   여기에   오기   전에   그때   기록을   잠시   살폈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아아.   자작님에게   시비를   거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연구의   발전   속도가,   황실의   지원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연구가   이런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한   경우는   거의   없어서요.”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로일렌이   내   어깨를   가볍게   붙잡았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나가서   황궁   마법사들과   함께   현상   발현   시험을   해보시지요.   이정도로   완벽한   마법진이라면   아마   첫   시도에   성공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주   대박이란   소립니다!”

“로일렌   정교수님.   조금만   진정하시는   게…….”

“진정이   되게   생겼습니까,   지금!   이건   역사에   남을지도   모르는   마법을   두   눈으로   목도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란   말입니다!”

“아니.   알겠으니까   잡아당기지   좀   말고…….”

“어서   가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마법사라는   사람이   손이   왜   이렇게   억센지.   어쩔   수   없는   관계로   나는   로일렌의   손아귀에   이끌려   응접실을   나섰다.

*

엘프는   로일렌의   호들갑이   우스웠다.

첫   시도에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을   해도   바로   해야지.   너희   인간들의   마력   용적이   아무리   벌레   같이   작아도   무조건   성공하게   되어있는   마법진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축적된   경험과   지식이   녹아있는   마법진이다.   테오라드의   마법은   성공하게   될   거고,   건방진   단명종인   로일렌은   테오라드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로인해   장난감이   수리된다면   나쁘지   않았다.

‘구경이나   해볼까.’

저택에서   빗자루질이나   하는   것보다는   그쪽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엘프가   응접실을   나서려는   순간,   누군가가   엘프의   옷을   붙잡아   뒤로   잡아당겼다.

켁!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친   엘프가   돌아보자,   하비드가   성난   얼굴로   엘프의   머리를   콩   때렸다.

“이놈이!   너   말고   다른   사용인들이   테이블을   정리하는   게   보이지   않느냐?   어서   돕지는   못할망정   가주님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려고   하다니,   정신머리가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하.”

싸늘하게   굳은   얼굴이   하비드를   노려본다.

‘죽일까.’

엘프는   하비드가   진심으로   싫어지기   시작했다.

저택의   앞뜰로   가는   길.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로일렌의   입은   쉴   줄을   몰랐다.

“정말   순수하게   놀랐습니다.   고작   3년   동안에   이렇게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다니요!   마탑의   날고   기는   교수들조차   하지   못할   경지입니다.   아!   저를   포함해서   말이지요.”

“3년이라는   시간이   고작이라는   단어에   포함될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연구의   진척도가   무지막지하니   이   경우에서는   고작이   맞습니다.   제가   괜히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닙니다?   이만한   성과를   내시고도   이렇게   겸손하시다니.   이것   참.   주변의   찬사를   받지   못한   천재는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하지   못한다는   게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양심에   가시가   돋친다.   마음   같아서는   방금   당신과   이야기를   나눴던   엘프가   내   마법진을   손봐줬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나   그럴   수   없는   관계로   입을   꾹   닫고   있으니,   로일렌은   대단한   착각   속에서   말을   이었다.

“조금   의외기는   합니다.   현   황제께서   연일   급진적인   정책을   내세우시는   터라   제국의   마법학도   자연히   그쪽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지   않습니까?”

대답을   바라는   것처럼   보여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께서는   세상의   부정한   것들을   모두   없애고   싶어   하시니   말입니다.”

“그렇지요.   관련해서   고문서를   찾아보니   만민과   만마가   에스테반   제국   아래에서   벌벌   떨던   때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현   황제께서는   그것에   큰   감명을   받으신   모양입니다.”

“황제   폐하를   아십니까?”

하려는   말이   뭔가.   내가   슬쩍   떠보자   로일렌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   예전에   군사   고문으로서   황제   폐하의   용안을   몇   번   뵌   것이   전부이니까요.   단지   그때의   느낌이   뭐랄까……   옛   영광을   재현한다면   흐트러진   백성들의   민심이   바로잡힐   거라고   맹신하고   계신   느낌이었습니다.”

“의아하게   들리는군요.   제국은   과거의   발자취를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제국은   여전히   제국으로서   대륙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아.   물론입니다.   그냥   저의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저는   그저   이   나라를   사랑하고   황제   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한   몸으로서   자그마한   의견을   토로한   것뿐입니다.”

내가   마뜩찮게   쳐다보자   로일렌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이   옆길로   새버렸군요.   본론만   말씀드리자면   살상   마법을   추구하는   현   제국의   흐름   속에서,   홀로   동떨어진   채   인공   강우   마법을   연구하겠다고   성명하신   테오라드   자작님이   대단하시다는   겁니다.”

로일렌의   말대로   현   제국에서   살상   마법을   연구하겠다고   하면   황실에서   좀   더   많은   지원을   해준다.   마법을   완성시켰을   때에   받는   보수도   다른   마법보다는   곱절을   받는다.

제도에   진출하기   위한   실적을   쌓기   위해서라면   살상   마법을   연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시대다.   그렇다고   모두가   시대의   흐름에   순응할   필요는   없었다.

“별로   대단한   것은   못   됩니다.”

나   또한   시대에   순응하지   못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으니.

일종의   고질병이었다.   다른   사람이   내   마법으로   인해   다치는   모습을   생각하니   도저히   살상   마법을   연구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생각한   것이   인공   강우   마법이었다.   기왕이면   내   마법으로   인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했으니까.

막상   연구에   돌입하니   실력이   뒤따라주지   않아서   수많은   좌절을   겪었지만…….

“대단한   것이   못   된다라.”

로일렌은   내   말을   다르게   해석한   모양인지   진지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대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셨기에   이만한   마법의   도식화를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정립하시고   대단치   않다는   말을   하시는   건지.   미진한   저로서는   감도   잡히지   않는군요.”

“아니.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혹시   마탑에서   교수로   활동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테오라드   자작님   정도면   학생들이   많은   지식을   배워갈   수   있을   겁니다.”

흥분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이런   사람인지.

내   말을   아예   안   듣고   있는   것   같아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고마운   말씀이지만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저는   데하름   가문의   당주이자   백작   각하를   따르는   부백작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렇군요.   제가   주제넘은   제안을   한   점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할   필요까지는   없으십니다.”

쓰게   웃은   나는   로일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앞뜰에   도착하였다.

앞뜰에는   금줄로   자수된   로브를   입은   황궁   마법사들이   대기하여   있었는데,   로일렌이   그들을   불러   세워   내가   건네준   마법   화지를   펼쳐들었다.

“테오라드   자작님께서   완성하신   인공   강우   마법입니다.   오류가   없음을   확인했으니   즉석에서   현상   발현   시험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준비하여   주십시오.”

허.   황궁   마법사들은   짐짓   놀란   것처럼   서로를   돌아보며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품에서   완드를   꺼낸   황궁   마법사들이   무어라   주문을   외우자,   잔디밭에   인공   강우   마법의   회로와   기호,   문양이   차례로   새겨진다.

그중에서   가장   젊어   보이는   마법사는   들고   온   가방에서   마석을   꺼내들어   마법진의   문양   위에   하나씩   비치하였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라면   염동계열의   마법을   사용하여   편하게   옮기면   될   것인데,   넓은   잔디밭을   뛰어다니며   마석을   손으로   직접   옮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의아했던   내가   로일렌을   쳐다보았다.

“왜   저러는   겁니까?”

“예?   무슨   말씀이신지?”

“마석   말입니다.”

“아.   마법진에   스며든   마나가   마법   발현   도중   공기   중에   휘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마석을   통해   붙잡아두는   도정   작업…….”

“그거야   저도   압니다.   왜   저   마법사분이   손으로   직접   마석을   옮기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겁니다.”

“아하.   그게   말이지요.”

말하기   부끄럽다는   듯   뺨을   긁적거린   로일렌이   멋쩍게   웃었다.

“저   친구가   신참이라서.   보통   신참   딱지를   떼기   전에는   선배들   앞에서   마법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고   하더군요.”

“부조리군요.”

“없어져야   할   폐습이지요.   몇   번   건의는   해봤는데   없어질   기미는   안   보이더랍니다.”

쯧쯧.   로일렌이   혀를   차는   와중에   멀리   있던   황궁   마법사가   손을   들어   흔들었다.   준비가   끝났으니   현상   발현을   시작하자는   소리였다.

고개를   끄덕인   로일렌이   품에서   완드를   꺼내들어   앞으로   걸어나간다.   그러다   아차   싶었는지   나를   돌아보았다.

“우산은   필요   없으십니까?   혹여나   마법에   성공한다면   비가   내릴   터인데.”

“성공한다면   우산이   문제겠습니까.”

“하긴.   틀린   말은   아니지요.”

싱긋   웃은   로일렌이   황궁   마법사들과   합류하였다.   그들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여러   이야기들을   주고받은   후   서로의   완드를   마법진의   중앙에   맞추고   영창을   외웠다.

우우우웅─

완드의   끝자락에   환한   빛이   서리는가   싶더니   마법진의   중앙이   밝게   빛난다.

마법진의   중앙에서   입체적으로   아른거리던   새하얀   빛은   한순간   폭발하듯   회로를   따라   움직였다.   영창은   가속화되고   수   개의   회로는   수십   개의   회로로   나뉘어   거미줄처럼   뻗어나갔다.

그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마법진의   외곽에   장식된   기호가   가지각색의   빛을   뿜으며   회로의   화력을   증폭시킨다.

마지막으로   17개의   문양이   찬연히   빛나며,   상공을   떠돌던   마나의   기운이   중앙으로   응축된다.

황궁   마법사들과   로일렌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며   하늘을   향해   완드를   높게   치켜들었다.   마지막   영창이   더해지고,   조용해진   세상   속에서   불현듯   폭발이   일었다.

콰아아아아앙─!

“윽!”

돌풍을   동반한   폭발이   용오름의   형태로   하늘로   치솟는다.

엄청난   기세로   솟아오른   검은   연기가   하늘에   닿아   물감처럼   번져나갔다.   순식간에   맑은   하늘을   뒤덮은   연기는   먹구름이   되어   사방을   점거하였다.

그리고.

투둑─

얄팍하게   떨어진   물방울이   손바닥에   닿아   흘러내린다.

성공인가   실패인가.   마법   발현을   끝마친   황궁   마법사들과   로일렌,   그리고   내가   복잡한   심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일대에   굵은   빗방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범위는   저택   주변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망막   너머에   비친   세상   전부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

빗물에   온몸이   젖어가고   있었지만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   세상.   우울한   풍경이   내게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아버지.”

모두가   불가능하다   말하였다.

네   마법은   바보   같은   이상만을   담았을   뿐이라고.

발상부터가   잘못되어   절대   완성할   수   없는   마법이라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다른   마법이나   연구하라고.

연구를   도와주러   왔다던   황실의   인원들은   어린   나에게   비난조의   말들만   들려줄   뿐이었다.

때문에   의기소침해진   나를,   아버지는   호탕한   웃음으로   위로해주었다.

─   남들이   너를   의심해도   네가   너를   의심하지는   말거라!   나는   아들을   믿는다!   이   마법이   언젠가   완성되어   황실   녀석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계속   연구해보도록   하자.   아버지와   함께   말이다.

오랜   시간   끝에,   오늘로서   증명된   것이다.

바보   같은   이상은   이따금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버지.   드디어   아버지와   함께   꿈꾸던   이상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가뭄으로   인해   발생하는   식량난이   없어질   것이다.

가뭄으로   인해   발생하는   다툼이   없어질   것이다.

물을   구하고자   벌이는   싸움이   없어질   것이며,   물   부족   현상으로   인해   촉발되는   전쟁이   사라질   것이다.

그로인해   세상은   좀   더   아름답게   변할   것이었다.

이   비가,   민초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가려줄   것이니.

“아하하핫!”

생각을   끝마친   내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   기쁜   나머지   체통이고   뭐고   지킬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나는   다만   양팔을   위로   든   채로   보라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내   웃음이   하늘에   닿아,   작고하신   아버지에게   들릴   정도로.

*

“이게……   되긴   하는구나.”

베이넌이   검의   품멜에   손을   얹은   채   허탈하게   숨을   내쉬었다.   갑주를   두드리는   빗방울들이   오늘따라   퍽이나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흐,   흐윽.   가주님께서   드디어…….”

옆에서는   응접실   정리를   끝내고   나온   하비드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크흥!”

아니,   이젠   콧물까지   훔친다.

하비드의   오른편에는   엘프가   우산을   든   채로   테오라드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뭔가   좀   이상하였다.

‘……할아범이랑   싸웠나?’

엘프가   우산을   오른쪽으로   당긴   채   들고   있었기에   하비드의   왼쪽   어깨가   비에   흠뻑   젖어가고   있었다.   누가   봐도   고의성이   다분하다.

감동에   젖은   하비드는   그걸   눈치   채지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굳이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베이넌은   무신경하게   엘프를   쳐다보았다.

“이봐.   오늘은   말썽   안   부리고   일을   잘   했다며?   네   년이   웬일이냐.”

격의   없는   말투에   엘프의   귀가   한   번   쫑긋거린다.   엘프는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빵만   먹으면   지루하니까요.   그러니   가끔씩은…….”

테오라드를   바라보는   엘프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과일도   먹어야겠죠.”

뭐라는   건지.   칭찬을   했더니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이   없다.

어깨를   으쓱인   베이넌은   테오라드를   돌아보았다.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이   흘러나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저렇게   해맑게   웃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는데.

마법이   완성된   것이   그리도   기쁠까.

“좋아   보이네,   도련님.”

뭐가   되었든   테오라드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   한   편이   푸근해지는   느낌이었다.

비는   오   분   정도   더   이어지다   끊어졌다.

마법적인   한계는   아니었다.   애초에   마법의   현상   발현이   가능한지   아닌지에   대해   확인하기   위해서   소량의   마나만   주입한   것이었으니까.

“대단합니다.   첫   시도만에   성공할   줄은   몰랐는데.”

비에   젖은   머리를   털어낸   로일렌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무어라   해줄   말이   없었다.   나라고   엘프가   이정도로   정교하게   마법진을   고쳤을   줄   어떻게   알았겠나.

로일렌은   내   침묵을   ‘천재의   오만함’   정도로   해석한   모양인지   허허   웃어보였다.

“황제   폐하는   물론이고   황녀   전하께서도   분명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제가   잘   말해놓을   테니   보수에   관련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마운   말씀이십니다.”

“제가   더   고맙지요.   솔직히   말해   별   소득   없이   돌아갈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대규모   마법을   성공시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저는   참으로   복이   많은   놈입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로일렌이   완드를   품에   집어넣었다.

“감사관의   역할이   끝났으니   저는   이제   가봐야   하겠군요.   저와   황실   사람들이   저택에   오래   머물면   민폐니까요.   아!   제공해주신   다과는   정말이지   맛있게   먹었습니다.   특히   초콜릿이   일품이더군요.   발지엄산   초콜릿은   제도에서도   구하기   힘든   것인데   말입니다.”

“저택을   방문하는   귀빈께   대접해드리기   위해서   재고를   몇   개   쌓아놨습니다.   원하신다면   따로   하나   챙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말씀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데하름   가문에게,   그리고   테오라드   자작님께   미움을   받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천연덕스럽게   입   꼬리를   올린   로일렌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만나   뵙게   되어   무척이나   영광이었습니다.”

내가   손을   마주   붙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로일렌   정교수님.”

“다음에   다시   볼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의미심장한   말.   악수를   끝낸   로일렌은   고개를   꾸벅   숙이는   것으로   작별을   고하고   뒤돌아   걸어나갔다.

황궁   마법사들도   내게   각자의   예의를   담아   인사를   건네고는   로일렌을   뒤따라   저택을   나섰다.

덕분에   고요해진   세상   속에서   어디선가   사부작거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뒤를   돌아보니   엘프가   양   손을   공손히   모은   채로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주인님.   저어…….”

평소에는   쳐다보기   무서운   얼굴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아름답고   기특하게   보인다.   내가   엘프의   양   어깨를   붙잡으며   기쁘게   읊조렸다.

“고맙다.   네   덕분에   나와   아버지의   비원이   이루어졌어.   일전에   집무실에서   네   뺨을   때린   것은   사과하마.   또한   원하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주인님.”

내   말을   끊은   엘프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무채색으로   물들어가는   붉은   눈동자가   심히   무섭게   다가왔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나를   향한   살의가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인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조금도   이해가   되질   않는데요.”

“어,   음…….”

엘프는   최대한   돌려   말하고   있었으나   내게는   저게   무슨   뜻인지   한   번에   와닿았다.

‘매도해주는   주인님’이란   역할에   충실하지   못하면   죽이겠다는   소리겠지.   제정신을   차린   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엘프의   어깨에서   손을   거두었다.

“네   년의   더,   덜떨어진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게   당연하다.   칭찬을   해줘도   알아듣질   못하니   해줄   필요가   없을   성싶구나.”

그제야   엘프가   표정을   풀고   울먹거린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내가   턱짓으로   저택을   가리켰다.

“할   말이   없으면   방으로   꺼져라.   네   얼굴을   보고   있으니   역겨움이   치미는군.”

“역겨운   얼굴이라   죄송해여어…….   그래도   저,   주인님께   말씀드릴   게   있어서어…….”

“무얼   말이냐?”

“제가   실수로   주인님이   아끼시는   접시를   세   개나   깨트려버렸어요.   저처럼   바보   같고   무능한   노예는   역시   주인님한테   벌을   받아야   해여…….”

접시는   또   언제   깨트린   건데   이   미친년아…….

“병신   같은   년.   그   건에   관해서는   적절한   체벌을   내릴   것이니   기다리고   있어라.”

내   말에   엘프의   울먹임이   멎는다.

어,   왜지?   불안한   침묵이   감도는   공간에서,   나는   내가   내뱉은   말을   천천히   복기하였다.

‘이번엔   잘못한   게   없는데?’

그도   그럴게   처벌을   하겠다고   했는데   싫어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연기가   어설펐나?’

아니.   그건   아니었다.   엘프를   통해   단련한   경멸과   혐오의   표정은   내가   봐도   깜빡   속아   넘어갈   정도로   완벽하다.

그렇다면   설마   말의   뉘앙스에서   불편함을   느낀   건가?   엘프의   입장에서는   내   비원을   이뤄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발휘했는데,   고작   ‘적절한   처벌’이라는   보상에   짜증이   났을   수도   있다.

역시   지금으로서는   그   가능성밖에   없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내가   재차   말했다.

“말이   엇나갔군.   ‘혹독한   체벌’을   내릴   것이니   각오하도록.”

내   예상이   맞았던   모양인지   엘프가   다시금   울먹거렸다.   천만다행이었다.

“시,   싫어여어……!   용서해주세여   주잉님……!”

“용서?   용서는   암퇘지   같은   네   년이   벌을   받고   난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하,   하지마안……!”

“징징거리는   목소리가   듣기   싫군.   네   방으로   꺼져라.”

보라는   듯이   손을   휘저으니   엘프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저택으로   걸어갔다.   일단   당면한   위기는   넘긴   셈이다.

그런데   혹독한   처벌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과제를   떠안은   느낌이라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온다.

“도련님!”

골머리를   싸매던   와중에   베이넌의   외침을   들려온다.   덕분에   내가   화색하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한량이나   마찬가지인   베이넌이라면   방법을   알고   있을   테니까.

내게   가까이   다가온   베이넌이   답지   않게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염원하시던   마법을   완성시킨   것에   감축드립니다.   아,   할아범은   감기   기운이   도진   것인지   기침을   내뱉기에   제가   방으로   밀어   넣고   왔습니다.”

“잘했다.   그보다   베이넌,   혹시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물건에   대해서   잘   아는가?”

“예?   여자들이   좋아하는   물건이라니…….   아,   혹시   성인용품을   말하시는   겁니까?”

“성인용품?”

“마녀들이   취급하는   성적인   물건을   말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뜬금없이   그런   건   왜   물어보십니까.”

말하기가   곤란하다.   내가   대답   없이   헛기침을   내뱉자,   베이넌이   다   알겠다는   듯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슬슬   그쪽에   관심을   가지실   때가   되었긴   합니다.   오늘은   늦었고,   내일   제가   아는   마녀의   가게에   도련님을   데려다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린다.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

늦은   밤.

워프   게이트를   통해   황궁으로   도착한   로일렌은   곧장   베넬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를   할   필요는   없었다.   기다리고   있다는   것처럼   문이   열려있었으니.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들어간   로일렌은   백사자가   그려진   거대한   휘장   앞에   앉아있는   베넬리아를   목격하였다.

그녀는   로일렌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관심이   없다는   듯   책상   위의   체스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

로일렌은   베넬리아에게   말을   걸려다가,   체스에   골몰하고   있는   모습이   생각   이상으로   진중한   바람에   그만두었다.   다만   황녀의   외양을   살필   뿐이었다.

잿빛이   감도는   검은   머릿결이   허리   아래까지   치렁하게   늘어지고,   무료함을   담아   반개한   눈동자는   찬연한   황금빛을   띈다.

턱선이   갸름하며,   가지런한   속눈썹은   황녀라는   명칭에   걸맞는   기품을   더해주었다.

기품은   단지   얼굴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베넬리아는   현재   제국의   장군들이   입는   군사   제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전혀   어설픈   기색이   없었다.

또래의   여식들이   프릴이   달린   드레스를   입으며   남자의   마음을   사기   위해   치장에   힘쓰는   것과는   확실히   궤가   달랐다.

절로   충성을   맹세하고픈   군주의   상이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베넬리아의   몸매가   제법   좋은   편인지라   유려한   곡선을   이루는   가슴   쪽에   자꾸만   시선이   간다는   것이다.

“불결하게   눈을   굴리는구나.”

헙.   놀란   로일렌이   급하게   시선을   올린다.   이쪽을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는   건지.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당황한   마음을   추스른   로일렌이   차분하게   말을   돌렸다.

“황녀   전하.   체스를   하실   거면   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시지   그랬습니까.”

“내키지   않는다.   네놈이랑   대국을   두면   내가   여의하지   못하니.”

“허허.   여의치   않아야   실력이   느는   법입니다.”

“네놈은   내가   말을   꼭   두   번   하게   만드는군.   양학당하기   싫단   소리지   않느냐.”

“양학이라니요?”

처음   듣는   말에   로일렌이   두   눈을   끔뻑거리자   베넬리아가   가볍게   혀를   찼다.

“대학   마탑의   정교수라는   녀석이   제   학생들의   유행어도   모르면   쓰나.   양학은   양민학살의   준말이다.   상대와   실력차이가   많이   나는   경우에   쓰는   말이지.”

“그게   무슨   망측한…….   학생들의   입단속에   신경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두어라.   재미있는   표현인데   굳이   자유를   앗아갈   필요는   없다.   더구나   네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따로   있을   것인데.   최근에   시끄러웠던   불온서적이   하나   있지   않느냐.”

탁.   흑의   나이트를   행마하여   백의   비숍을   잡아낸   베넬리아가   백의   입장에서   다음   수를   고민한다.

로일렌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재차   헛기침을   내뱉었다.

“황녀   전하를   모욕하는   외설적인   서적을   작성   및   유출한   범인은   잡아들였습니다.   재판을   남겨두고   있습니다만…….”

“죽이지   말거라.”

“예?”

“범행이   비열한   것을   보면   둘째   오라비의   짓이겠지.   내   평판을   깎아내리려고   뒤에서   수작을   부린   것이   틀림없다.   그걸   제쳐두더라도   나는   해당   서적이   적잖이   마음에   들었다.”

로일렌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혹시   보셨습니까?”

“그래.   소설속의   내가   적장의   포로로   잡혀   삼일밤낮을   강간당하는   장면은   아직도   기억난다.   심리묘사가   탁월하여   제법   꼴리더구나.”

“화,   황녀   전하!”

“놀랄   것   없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물론   범인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지   벌을   주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놈의   왼쪽   손목과   오른쪽   발목을   잘라라.   마취를   하지   않고   단두대가   아닌   톱으로   말이다.”

마취를   하지   않고   손목과   발목을   자르라니.   출혈이나   쇼크로   인해   죽을   가능성이   현저하게   높았다.

만약   죽지   않는다고   해도   반역의   꼬리표를   달고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한다.   손목과   발목이   잘린   죄인이라면   특정하기도   쉬우니   필히   백성들에게   맞아죽을   것이다.

베넬리아는   범인을   살리라고   말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범인을   죽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둘째   오라비에게   경고를   전함과   동시에   자신의   정적들에게   위협을   가하려는   목적인가.   태평한   얼굴로   간책을   꾸미고   있으니   묘하게   소름이   돋는다.

“말씀   받들겠습니다.”

“그래야지.”

로일렌의   말을   받아치며   베넬리아가   기물을   옮겼다.   그러더니   후후   웃으며   ‘체크메이트’라고   작게   속삭인다.   본인이   본인을   이긴   것에   불과한데도   꽤나   기쁜   안색이었다.

“저,   그런데   황녀   전하.”

“말하라.”

“일전에   말하신   데하름   가문의   인공   강우   마법에   대해   보고를   드리려고   합니다.”

“아.   그거야   당연히   실패했겠지.   시간이   촉박하지   않았더냐.”

“아닙니다.   성공했습니다.”

성공?   여태껏   체스   판을   보고   있던   베넬리아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성공했다니?   네놈은   지금   내게   농이라도   던지는   것이냐?”

“농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황궁   마법사들과   함께   현상   발현   시험도   마쳤습니다.”

“뭐라?”

평온했던   베넬리아의   표정에   파문이   일었다.   경악에   가까운   감정이   의아함을   담아   베넬리아의   마음속을   파고든다.

‘대체   어떻게?’

부황의   호출에   의해   황궁에   온   레오베르크   백작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테오라드의   이야기를   떠벌리기에,   반쯤   장난삼아   데하름   가문에   연구   보고를   올리라는   서신을   보냈었다.

연구의   진척도가   형편없으면   레오베르크   백작을   견제할   구실이   생기고,   진척도가   있다고   하면   황실에서   해당   마법을   사들여   제대로   연구하면   되었으니까.

그런데   인공   강우   마법을   완성했다니.   삼년   전의   연구   기록은   분명   오류투성이의   형편없는   마법진이었을   텐데.

‘어쩌면.’

그   모든   게   눈속임에   불과하였을지도   모른다.   연구는   진작에   완성되었으나   적절한   때가   되기   전까지   고의로   성과를   밝히지   않은   것이리라.

이유는?   베넬리아가   알기로   데하름   가문의   전대   가주는   급병으로   돌아갔다.   만약   테오라드가   연구의   실적을   홀로   오롯이   독점하기   위해서   전대   가주가   죽을   때까지   기다린   거라면…….

“하하핫.”

베넬리아의   입에서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테오라드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면모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교활한   홍관조   같으니.’

야망을   꿈꾸는   젊은이를   어찌   싫어할   수   있을까.   주구장창   남의   눈치나   보는   대신들과   환관들에   비교하면   꽤나   강단   있는   남자였다.

‘레오베르크   백작이   왜   그렇게   칭찬을   일삼았는지   알만한   대목이군.’

그러나   원석인지   아닌지는   겉에   묻은   불순물을   털어내   봐야   아는   법.   베넬리아는   속단하지   않으며   로일렌을   응시하였다.

“흥미가   생겼다.   이리   와서   앉아라.   테오라드   데하름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도록   하지.”

황녀   전하가   이토록   타인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로일렌은   의아해하면서도   베넬리아의   요청에   기꺼이   응하였다.

다음날,   펠가로인   백작령   붉은   깃털   거리.

“여기입니다.   아마   백작령   안에서   이만한   가게를   찾기는   힘들   겁니다.”

베이넌은   약속대로   나를   마녀의   가게에   데려다주었다.

규모가   그리   커보이지는   않았지만   가게의   간판만은   심각할   정도로   눈에   잘   띄었다.

[마녀의   도구로   당신의   연인을   성노예로   만들어보세요!]

노골적이다   못해   망측하기까지   한   문구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아무리   매춘과   퇴폐적인   오락이   성행하는   붉은   깃털   거리라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나간   게   아닌가.

내가   선뜻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있으니   베이넌이   내   어깨를   감싸며   가게의   문고리를   붙잡았다.   덕분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베,   베이넌!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무슨   첫날밤   치르는   여식   같은   말을   하고   계십니까.   오자고   하실   땐   언제고.”

“오해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내가   원해서   오고   싶다고   한   게   아니라……!”

“예에.   숫총각들이   다   그딴   소리   하면서   가게에   입장하곤   합니다.   도련님도   별   다를   건   없네요.   크게   특이한   가게는   아니니까   너무   긴장하지는   마시고요.”

장난어린   얼굴로   나를   쳐다본   베이넌이   문을   확   열어젖힌다.

걱정되는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나는,   다른   의미로   당황하고   말았다.

‘……어?’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가게의   풍경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온갖   야한   물건들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을   거라는   내   생각과는   달리,   두개골   모양의   장식품이나   저주인형과   같은   오컬트적   인테리어가   가게를   꽉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간판을   못   보고   들어왔다면   평범한   마녀의   집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성인용품을   판다던   가게가   맞나?   조금   혼란스러운   마음속에서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니   구석진   공간에서   누군가가   뚜벅뚜벅   걸어온다.

“베이넌?   옆의   그   잘생긴   남자는   누구야?”

검은   머릿결을   흐트러지게   늘어놓은   묘령의   여인이,   흑연처럼   새까만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프릴이   달린   고딕   드레스를   입은   채   손에는   파이프   담배를   들고   있는   모습이   꽤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베이넌은   여인이   익숙한   모양인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다,   드레메스.”

“응.   오랜만.   그런데   옆에   따먹고   싶게   생긴   남자는   누구냐니까?”

언행이   천박하다   못해   당황스럽다.   내가   무어라   말하려고   하자   베이넌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일단은   자기한테   맡겨달라는   것처럼   보였다.

“어허.   말조심해.   이분은   데하름   가문의   테오라드   도련님이시니까.”

“테오라드?   그게   누구였더라.”

지극히   오만한   시선으로   내   위아래를   훑어보던   드레메스가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를   입에서   떼어내며   연기를   후   불어낸   드레메스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억났어.   착해빠진   숫총각이지?   약혼녀가   애가   타겠어.   너처럼   고지식하게   무던한   스타일은   답답한   법이거든.   잘생기지만   않았어도   여자한테   인기   없었을   타입이네.”

“드레메스.”

“왜?”

“좋은   말로   할   때   예의를   지켜.”

“싫어.   데하름   가문의   당주면   뭐   어쩌라는   건데.   인간들이   만든   계급을   우리   마녀들이   대우해줄   필요는   없잖아?   거기다   나는   ‘독월(讟月)   조합’의   수장을   겸임하고   있어.   너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독월   조합이라면   나도   잘   알고   있다.

풀어   설명하자면   ‘원망하는   달’이란   뜻으로,   과거   교단에서   행했던   마녀   사냥에   대한   분노를   아직까지   잊지   않은   집단이다.   또한   마녀   사회에서   가장   큰   규모를   이루고   있는   조합이었다.

그런데   독월   조합의   수장이   왜   성인용품점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가.   내   의문은   베이넌의   다음   말에   의해서   해소되었다.

“돈   나갈   곳이   많은   거지라는   뜻이겠지.   안   그러냐?”

“……베이넌.   너는   여자로   태어났으면   마녀가   됐을   거야.”

“미안한데   나는   빛의   신을   믿고   있어서.   마녀가   됐으면   자살했을   걸?”

“진짜   나빠.   그냥   나가죽어   병신아.”

“병신은   우리   도련님을   욕보인   네가   병신이고.”

“이,   이   개자식이…….”

파이프   담배를   든   드레메스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둘   사이가   꽤나   친하다는   건   알겠는데,   중간에   낀   내가   괜히   머쓱해진다.

베이넌은   그런   내   눈치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장사   할   거야   말   거야?   우리   도련님이   순둥이처럼   보여도   능력은   좋아서   가문에   돈이   꽤   많거든?   우량   고객   놓치기   싫으면   그   건방진   태도부터   고쳐.”

“너,   내   친구   맞아?”

“왜   이래.   우리   섭섭하게   굴지   말자고.   나는   네   친구이기   이전에   도련님의   가신   기사잖아.   너도   지금은   마녀이기   이전에   성인용품점   사장이고.   공과   사는   구별해야지.”

“짜증나…….”

눈살을   찌푸린   드레메스가   뒤돌아   걸어갔다.

화가   나서   뒷문을   통해   그대로   나가는   건가   싶었는데,   구석진   곳에서   나무   테이블을   끌고   오더니   사람   수에   맞춰   의자   세   개를   가져와   테이블   앞에   놓았다.

이어   드레메스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가게에   마련된   작은   주방에서   물수건이   날아와   손에   잡힌다.

쓱쓱─

물수건으로   테이블까지   열심히   닦은   드레메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러더니   나랑   베이넌을   번갈아   바라본다.

“뭐해?   손님으로   왔으면   멀뚱거리지   말고   앉아.”

자존심보다는   돈이   먼저인   타입이구나.

작게   웃은   내가   드레메스의   반대편에   앉았다.

베이넌도   자연스레   내   옆에   앉더니   돌연   거드름을   피웠다.

“쩝.   저택에서   여기까지   왔더니   목이   좀   마르네.   뭔가   마실   거   없냐?”

“닥쳐   베이넌.   너는   내   손님   아니야.   테오라드가   내   손님이야.”

“도련님도   나랑   똑같이   생각하실   걸?   안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목이   좀   마른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베이넌이   드레메스를   향해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봤지?   간단하게   커피   두   잔   타와.”

“알았으니까,   넌   주둥이   좀   다물어.”

드레메스가   손을   들어   몇   번   휘젓자   주방에   있던   컵과   스푼이   두둥실   떠오른다.   그걸   본   베이넌이   건수를   잡았다는   것처럼   혀를   쯧   찼다.

“손님   앞에서   건방지게   마법   쓰게   돼있냐?   직접   가서   타와.   빨리.”

“싫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너   저번에   염동   유지   못해서   설탕   엄청   들이부은   거   기억   안   나?   그때처럼   실수   안   한다는   보장이   있냐?   그냥   갔다   와.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닌데.”

드레메스가   베이넌을   세차게   노려본다.   언뜻   살기가   흘러나올   정도로   흉흉한   시선이었지만   베이넌은   딴청을   피우며   휘파람이나   불었다.

결국   백기를   든   것은   드레메스였다.

“지랄이야   진짜…….”

드르륵.   의자에서   일어난   드레메스가   주방으로   걸어가서   손으로   직접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내가   베이넌의   옆구리를   툭   두드렸다.

“베이넌.”

“예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대체   독월   조합장이랑   어떻게   아는   사인가?”

“아.   제가   용병   생활을   전전할   때   일적으로   만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때   우연찮게   술친구가   돼서   지금까지   인연이   닿은   거고요.   성질이   좀   더럽긴   한데   나쁜   마녀는   아니니까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확실히.   독월   조합원들은   반인류적인   사상이   강하다고   들었는데,   정작   그   우두머리를   자처하고   있는   드레메스는   성격이   조금   까칠한   마녀에   불과하였다.

본심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지금으로서   알   방법이   없지만,   인류   전체를   악으로   보고   불특정   다수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부류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베이넌.   지금   보니까   성질은   네가   더   더러운   거   같은데.”

“예?   오해십니다.   저는   지금   도련님을   위해서   꼬장을   부리고   있는   거라고요.”

“나를   위해서?”

“그렇습니다.   도련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마녀라는   족속들은   첫   만남에   위계   서열을   잡아두지   않으면   두고두고   낮잡아봐요.   그래서   도련님이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을   드레메스에게   박아주고   있는   겁니다.”

……말은   그럴싸한데   정말   나를   위해서   심술을   부리는   게   맞나?

그냥   내   위세를   등에   업고   친구를   괴롭히는   것으로   보여서   마음이   영   편치   못하다.   그래도   베이넌이   내게   거짓을   고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한   번   믿어보기로   하였다.

“자,   커피.”

어느새   커피를   타온   드레메스가   나와   베이넌에게   잔을   건넨다.

내가   잔을   받아들고   고마움을   표하자   드레메스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말해봐.   원하는   성인용품이   뭐야?”

원하는   성인용품?   그런   걸   물어봐도   내가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성인용품에   관해서는   문외한이기도   하고.

“잘   모른다.”

“몰라?   설마   너,   이런   곳   처음   오는   거?”

“처음이면   안   되나?”

“아니.   그건   아니지만…….”

이야기가   길어질   것처럼   보였는지,   드레메스가   반대편   의자를   꺼내   앉았다.

“그럼   대략적으로라도   어떤   걸   원하는지   말해봐.   거기에   맞춰서   줄   테니까.”

“대략적으로…….”

엘프가   어떤   성인용품을   좋아할   것인가.   나는   지금까지   엘프를   매도했던   방식을   모두   떠올린   후   고민을   끝맺었다.

“일단   피가   나오면   절대   안   된다.   신체에   위해를   가해도   괜찮지만   상처를   입혀서는   안   돼.”

“다른   건?”

“기왕이면   육체적인   쾌락을   줌과   동시에   정신적으로도   괴롭힐   수   있는   용도가   괜찮을   것   같군.   그렇다고   너무   가학적이면   안   된다.”

“까다롭네.   확실히   하기   위해서   하나만   더   물어볼게.”

드레메스가   다리를   양쪽으로   벌리고   치마를   들췄다.   덕분에   가터벨트   스타킹과   도끼   자국이   선명한   검은색   팬티가   적나라하게   보이고   말았다.

“여기에   박는   건?”

망측하여   보고   있기가   힘들다.   내가   의도적으로   고개를   들어   드레메스의   눈을   마주보았다.

“……아마   싫어할   거   같은데.”

“확신은   없어?”

“성인용품을   써보는   건   처음이다.”

“흠.   그럼   용두(龙头)는   서비스로   줄게.”

“용두라니?”

“받아보면   알아.   좋아할지   말지는   네   연인한테   직접   물어보고.   나머지는   요즘   잘   나가는   물건들   중에   몇   개   추려서   사용   설명서랑   같이   동봉해서   줄게.”

드레메스가   치마를   놓고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그러자   수납장에서   수정구슬과   작은   종이가   허공을   날아와   드레메스의   손에   안착하였다.

드레메스는   당연한   것처럼   그   두   개를   내게   내밀었다.

“내   표식이   새겨진   수정구슬은   위치   치환용이야.   성인용품을   다   포장하면   내가   마법으로   보내줄   테니까   평평한   곳   위에   놔둬.   오늘   안에는   보내줄게.   종이는   내   명함.   가게에   찾아오기   귀찮으면   명함을   태워줘.   바로   날아갈   테니까.”

“대금은?”

“네   가문에   청구할게.   돈이   당장   급한   것도   아니라서.   청구   대금   명목은   ‘생활   마도구   구매’로   해놓을   테니까   쪽팔릴   일   없을   거야.”

역시.   한두   번   팔아본   솜씨가   아니다.

고개를   끄덕인   내가   수정구슬과   명함을   받으려는   순간,   베이넌이   불쑥   끼어들었다.

“잠깐.   드레메스.”

“왜   또?”

“너   아까부터   말이   되게   짧다?   도련님이   네   친구야?”

드레메스의   이마에   격자로   힘줄이   돋아난다.

“베이넌.   그만   까불어.   나   사람   죽여본   적   있는   여자야.”

“나는   없는   줄   아냐?   내가   용병   생활할   적에는   포크로도   사람   멱을   땄어.”

잠시간의   침묵.   살얼음판처럼   싸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베이넌이   보라는   것처럼   능청을   부렸다.

“알겠다.   말투까진   뭐라   안   하겠는데   도련님을   부르는   명칭에는   경의를   가져라.   싫으면   뭐,   우량   고객   하나   잃는   셈   치던가.   가게는   여기   말고   더   있으니까   우린   손해   볼   거   없어.   안   그렇습니까,   도련님?”

왜   날   끌어들이는   건지.

갑질은   그쯤   하라고   말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드레메스가   입을   열었다.

“나,   나는…….   마녀는   인간을   섬기지   않아.”

“누가   섬기라고   하냐?   명칭만   좀   조심하라고.”

“그건…….”

드레메스의   얼굴에   들어선   수심이   깊어진다.   자존심이냐   돈이냐.   한참을   고민하던   드레메스가   내게   어그러지는   미소를   지었다.

“아,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   테오라드…   도련님…….”

드레메스는   결국   자본에   굴복하고   말았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투과한   햇볕이   어스러지게   내리쬐는   성당.

수많은   신도가   지켜보는   가운데,   교구장   주교   레비함이   경건한   태도로   성경을   덮었다.

“이로서   정기   예배를   끝마치겠습니다.   빛의   신   카라티아스님께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며,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빈민에게   은혜를   베풀도록   하십시오.”

말을   끝마친   레비함이   양   손을   모은   채   짧게   읊조렸다.

“아멘.”

레비함의   선창에   신도들이   고개를   숙이며   똑같이   외친다.

예배를   끝마친   신도들이   자연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성당을   하나   둘   나가기   시작하자,   경건함에   어수선한   분위기가   섞인다.

레비함   또한   성당을   떠나기   위해   설교대에서   개인   물품을   갈무리하는   찰나,   검은   사제복을   입은   이단   심판관이   곤란한   얼굴로   다가왔다.

데하름   가문의   저택에   파견을   갔었던   함타르신이었다.

“저,   주교님.”

“아!   함타르신   사제님.”

레비함은   특유의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함타르신을   마주하였다.

“저에게   무슨   볼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것이…….   주교님께서   오늘   데하름   가문의   저택에   방문하실   요량이라   들었습니다.”

“아,   맞습니다.   어제   데하름   가문의   저택에서   발생한   엄청난   마법에   대해   궁금한   점도   있고,   신실한   신도이신   테오라드   가주님께   인사도   드릴   겸   말이지요.”

신실한   신도라는   말에   함타르신의   미간이   좁혀진다.

엘프의   표식이   몸에   남아있는   이상   진실을   말할   순   없겠지만,   존경하는   주교님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경고는   해주고   싶었다.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데하름   가문에   발을   들이시는   건   좋지   못한   생각인   것   같습니다.”

“좋지   못한   생각이라…….”

으음.   턱을   쓰다듬은   레비함이   순진함을   담아   되물었다.

“함타르신   사제님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감이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감이라.”

레비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명을   받드는   이단   심판관이   단순히   감이   좋지   않아서   제   발걸음을   막아서려는   건가요?   합당한   이유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아니면,   저택에서   제가   모르는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지기라도   한   걸까요?”

함타르신의   어깨가   움찔   떨린다.

레비함이   자신을   떠보고   있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웃는   낯의   이면에서   의심에   대한   어떠한   명징함이   깃들어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할   것이다.   단지   저택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다는   걸   눈치   채고   있을   뿐.

‘막아야   한다…….’

아무리   신성   마법에   특출   난   레비함   교구장   주교라고   해도   그   무지막지한   엘프의   상대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엘프를   막기   위해서는   최소한   교단의   신성   기사단…….

혹은   교황   성하나   성녀   예하께서   친히   저택에   발을   들이시어   부정한   것을   소탕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타르신은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엘프가   서늘한   안색으로   자신에게   전했던   경고가   도저히   잊히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   이걸로   나는   언제든지   너를   죽일   수   있어.   관념을   신으로   믿는   나부랭이야.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각인된   기억이   양심을   뒤덮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함타르신은   가장   신성한   공간인   성당에서,   거짓말을   일삼는   죄악을   행하는   것보다   엘프의   말을   거스르는   것을   더   두렵게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함타르신은   주교의   선택을   막을   수   없었다.

“……저택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신명이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왔으나,   정작   목숨이   걸리니   그렇게   행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주교님.”

목소리의   떨림을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감춘다.

레비함은   함타르신의   행동에서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레비함이   데하름   저택에   방문하려는   목적은   신실했던   이단   심판관을   겁쟁이로   만들어버린   ‘무언가’에   대해서   명확한   증거를   포착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예.   조심하겠습니다,   함타르신   사제님.”

대마법의   발현에   대해   논의하고자   함은   어디까지나   저택   방문을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테오라드가   함타르신을   겁박하여,   구주의   종이여야   할   사람을   제멋대로   부리려고   한   게   사실로   밝혀진다면   응당   천벌을   받아야   하였다.

빛의   신께서   그걸   원하고   계실   테니까.

“혹여나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레비함이   인자한   얼굴로   뒤편을   올려다보았다.

성당의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여신상이   신성함을   담아   이쪽을   굽어보고   있는   게   보인다.

그   장엄한   광경   앞에서   레비함은   확신을   담아   읊조렸다.

“빛의   신께서는   믿는   자를   배신하지   않으십니다.”

*

“푸하하핫!”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베이넌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웃긴지   허벅지까지   퍽퍽   두드리면서   눈물을   훔친다.

“……미친   것이냐.”

“아니.   웃기지   않습니까,   도련님.”

“뭐가?”

“드레메스   그   년이   도련님한테   존댓말   하는   것   말입니다.   아쁘로   잘   뿌탁할께용   도련닝…….   푸흐흡!”

성대모사가   너무   과장된   거   아닌가.   내가   마뜩찮게   쳐다보고   있으니   베이넌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는   호흡을   진정시켰다.

“아무튼   덕분에   재미   좀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재미라니?   자네가   말하기로   마녀들은   첫   만남에   위계   서열을   잡아놔야   한다고   심술을   부린   거라면서.”

“그것도   맞는데,   재미있었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드레메스   그   년   지금   가게에서   온갖   욕이란   욕은   다   지껄이면서   입으로는   불을   내뿜고   있을   겁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조만간   저를   죽이러   올지도   모르겠네요.”

“……널   죽이러   오면   곤란한   게   아닌가?”

내   의문에   베이넌이   피식   웃어보였다.

“죽이러   와도   죽일   수는   없을   겁니다.   마녀는   자신의   ‘친구’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아요.   마녀   사회에서는   일종의   불문율   같은   거라서.”

“그건   처음   들어보는   소린데.   마녀와   친구가   되기가   어렵나?”

“음.   어렵다면   어렵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교단에서   행했던   마녀   사냥에   다른   사람들도   가담했다고   들었으니까요.   그래서   마녀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베이넌   자네는   잘도   마녀와   친구가   됐군.   둘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   건가?”

“그게.   설명하자면   긴데…….   별   재미는   없는   이야기니   듣고   싶지   않으실   겁니다.   그보다   제가   도련님에게   오크   따먹은   이야기를   들려줬었습니까?”

능구렁이   같은   놈.   화제를   돌리는   게   능통하다   못해   숨   쉬듯   자연스럽다.   거기다   여기서   제일   큰   문제는   ‘오크를   따먹은   이야기’가   엄청나게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명망   높은   데하름   가문의   당주이자   백작   각하의   신임을   받는   부백작.   체통을   위해서라도   선뜻   궁금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대신   은근한   눈짓을   보내는   것으로   약소한   티를   낼   뿐이었다.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정   말하고   싶다면.”

“흐흐.   알겠습니다.”

좌석에   등을   기댄   베이넌이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며   말했다.

“제가   용병   생활을   할   적에,   그러니까   오크   정벌   전쟁으로부터   한참   전   이야기입니다.   그때   제가   여러   의뢰들을   닥치는   대로   수주하고   다녔는데,   어느   날   인근   산의   오크   부족을   퇴치해달라는   의뢰가   온   겁니다.”

“그래서?”

“저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실력   있는   모험가들을   불러   모았죠.   마법사도   한   명   끼어있었나   그랬을   겁니다.   근데   막상   가보니까   오크가   너무   강한   겁니다.   그때   제   실력이   허접하기도   했고.”

베이넌이   혀를   쯧   차며   말을   이었다.

“결국   대패한   저희는   오크   부족의   인질로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대로   죽겠구나   싶었는데   부족의   족장이   암컷   오크인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베이넌.   너   설마…….”

“예.   한   판   뜨자고.   내가   너를   만족시켜주면   우리를   살려서   보내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쳤습니다.   부족장은   내가   웃겼던   모양인지   그날   밤   시중을   들게   해주더군요.   그런데   막상   족장의   움막에   들어가니   걱정이   엄습하더라   이겁니다.”

슬슬   듣기가   곤란해진다.

“인간의   자지   크기로   어떻게   그   거대한   년의   장단을   맞춰주겠습니까?   제가   작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오크   년을   뿅   가게   만들   정도는   아니거든요.   그래서   도구를   이용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마법사의   지팡이를   빌려서   제   자지에   고정시킨   후   필사의   생존   섹스를…….”

더   이상   못   들을   것   같아서   내가   손을   들어   제지하였다.

“그쯤하지.”

“예?   지금부터가   재밌는   부분인데.   이거   이래봬도   용병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한   일화입니다?”

“유명하고   자시고   네가   살아서   이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다음   내용을   유추할   수   있게   해주지   않더냐.   듣지   않아도   될   부분을   듣고   싶지는   않다.”

뺨을   긁적인   베이넌이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뭐.”

딱히   내가   아니더라도   오크를   범한   이야기를   그리   자세히   듣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괜히   속이   더부룩한   바람에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하였다.   안면에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혼란스러워진   마음을   진정시켰을   쯤.

덜컹─!

마차가   멈추며   마부가   문을   열어주었다.

“가주님,   기사님!   도착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베이넌이   수정   구슬을   들고   먼저   내린다.   뒤따라   내린   나는   베이넌의   옆을   걸으며   저택의   입구로   향했다.

시선은   베이넌이   들고   있는   수정   구슬을   향한   채였다.   마녀의   표식이   새겨진   수정   구슬을   보고   있으니   괜히   호기심이   동한다.

“그런데   베이넌.   과거   교단과   마녀들이   큰   싸움을   벌였는데,   교단   사람들이   상주하는   영지에서   마녀들이   장사를   해도   되는   건가?”

“크게   상관은   없을   겁니다.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서로의   자유를   인정하였으니까요.   물론   교단의   사람들에게   마녀와   거래를   한다는   걸   들키면   여러   오해를   받긴   할   겁니다.”

“오해라면?”

“보통은   훈계   차원에서   끝나겠지만   종교에   독실한   분에게   걸린다면   이단으로   몰아갈   빌미를   제공하는   것……?”

베이넌이   말을   멈추고   우두커니   멈춰   선다.

나   또한   자연히   걸음을   멈추고   베이넌의   시선을   쫓았다가,   얼음장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레비함   주교님?’

새하얀   사제복을   입고,   목에   청색의   영대(领带)를   두르고   있는   레비함이   앞뜰에   새겨진   마법진을   살펴보고   있었다.

영대를   벗지   않고   온   것은   성무   집행을   하러   왔다는   소린가?

물론   평소에도   예배를   끝마친   상태로   돌아다니기는   하신다만   지금   상황은   상당히   난처하였다.

그도   그럴게   우리는   지금   마녀의   표식이   찍힌   수정   구슬을   들고   있었으니까.

“어…….   이쪽을   보신   것   같은데요,   도련님.”

설상가상으로   레비함이   우리를   발견하였다.

가볍게   손을   흔들며   웃는   모습을   보니   소름이   다   끼쳐왔다.

침을   꿀꺽   삼킨   내가   최대한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베이넌.   나는   가문의   위상과   식솔들의   안전을   그   누구보다   위하는   사람이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가문의   명예와   식솔들의   목숨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거야   저도   잘   압니다.”

“그렇기에   가끔은   공리(公利)를   위해서   어느   한   명은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도련님?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하지   못하여도   괜찮다.   내가   베이넌을   돌아보며   진중한   어투로   말했다.

“그러니   지금부터   그   수정   구슬은   자네가   산   것이네.”

베이넌은   약   3초   뒤,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제가요?”

베이넌은   멍하니   수정   구슬을   내려다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고는   이해가   안   된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혹시   주교님한테   제가   이걸   샀다고   말하라는   겁니까?”

“그게   아니다.   그러면   네가   교단의   의심을   사지   않겠는가.”

“그럼   방금   하신   말씀은?”

내가   레비함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저   네   물건처럼   간수하라는   것이다.   내가   주교님의   시선을   끌   터이니   그   틈에   수정   구슬을   들고   저택으로   들어가라.   그대로   집무실까지   가서   수정   구슬을   집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될   거다.”

지금   레비함의   위치에서   베이넌의   손에   들린   수정   구슬을   볼   수는   있겠지만   마녀의   표식까지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점을   노려서   이걸   ‘관상용으로   산   평범한   수정   구슬’로   둔갑시킬   필요가   있었다.

가까이서   확인하지   않으면   모를   것이니,   시야의   사각을   이용하여   베이넌을   재빨리   저택   안으로   밀어   넣으면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   완성된다.

내   설명을   이해한   베이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수정   구슬을   품에   숨겼다.

“나쁘진   않은데   그러면   도련님이   위험에   노출되는   거   아닙니까?   제가   수정   구슬을   들고   가다가   들키는   순간   도련님의   계획이   다   들통   나고   말   텐데요?   성직자를   속이는   것은   중죄지   않습니까?”

“앞서   말했지   않느냐.   공리를   위해서라면   어느   한   명은   희생해야   한다고.   만약   들킨다면   내가   감수하도록   하겠다.”

“아.   그래서…….”

베이넌이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도련님께서   시선을   끌어주신다면   최대한   빠르게   저택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믿고   맡기마.”

나와   모종의   시선을   주고받은   베이넌이   레비함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저택으로   걸어간다.

반대로,   나는   크게   웃으며   레비함에게   다가갔다.

“하하하!   레비함   주교님!   오랜만입니다!”

베이넌을   의심스럽게   주시하던   레비함이   내   쪽을   돌아본다.

나를   마주한   레비함의   입가에   싱그러운   미소가   걸렸다.

“예.   말씀   주신   것처럼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군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저는   별   탈   없이   잘   지냈지요.   빛의   신께서   가문을   잘   보살펴주신   덕분입니다.”

“다행입니다.   그보다   저   기사   분은   무슨   일이   있으시기에   발걸음을   저리   빨리하시는…….”

레비함의   시선이   베이넌   쪽으로   기운다.   돌아보는   순간   낭패였음으로   내가   급하게   말을   꺼냈다.

“아!   호,   혹시   마법   때문에   오셨습니까?”

“마법이요?   아.”

레비함이   잠깐   잊고   있었다는   듯   잔디밭에   새겨진   마법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에   그을린   것처럼   자국이   남은   마법진은   육안으로   식별될   정도로   선명하였다.

“그렇습니다.   관련해서   논의를   좀   해보고   싶어서요.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신도들에게   듣기로   데하름   가문의   저택에   거대한   용오름이   발생하고   비가   내렸다고   하더군요.”

“예.   황실에서   오신   황궁   마법사분과   대학   마탑의   정교수님이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겸손이십니다.   그들은   손을   빌려준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기적의   단초를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테오라드   가주님이십니다.   또한   천기(天机)를   거스르신   분이기도   하지요.”

마법진에서   시선을   거둔   레비함이   나를   가만히   응시하였다.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불안하여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그러나   티를   내지   않고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연기하였다.   레비함은   그런   나를   한동안   관찰하더니   다소   짓궂게   웃었다.

“농담입니다.   원하는   때에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은   결국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일이니   빛의   신의   계율에   어긋날   리가   없지요.   제   농담이   혹여   가주님께   심려를   끼쳐드렸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심려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괜스레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잠시   멋쩍게   있던   내가   저택을   가리켰다.

“안으로   드시지요.   밖에서   오래   서   있기에는   날씨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부디   제가   주교님을   대접해드릴   수   있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신의   종을   자처하는   자가   대접을   바랄   순   없습니다.”

대접을   바랄   수   없다라.   레비함은   온화한   어투로   말하고   있었으나   저기에   속으면   안   된다.

대접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성직자들이   흔히   하는   너스레니까.

저   말만   믿고   성직자를   돌려보냈다가   고초를   겪은   가문이   한   둘이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하.   거창하게   말해   대접이지   차를   한잔하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빛의   신께서도   차   한   잔   정도라면   너그럽게   용서해   주실   겁니다.”

내가   재차   권하자   레비함이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신세를   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응접실까지   모시겠습니다.”

거절을   당하지   않아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내가   레비함의   안내를   자처했다.

평소에는   하비드가   이런   일을   해야   하지만…….

지금은   감기   기운에   앓아누웠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쯤이면   베이넌도   내가   맡긴   임무를   끝마쳤겠지.’

이대로   레비함을   대접하고   돌려보내면   만사형통이었다.

그러나   경거망동하지   말자.

마음을   굳게   먹은   나는   최대한   여유로운   태도로   레비함과   말을   나누며   응접실에   도착하였다.

“발지엄산   초콜릿을   드셔보셨습니까?   입   안에   들어가면   사르르   녹는   것이   무척이나…….”

자연스레   응접실의   문을   열던   나는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했다.

엘프가   응접실의   테이블   앞에   앉은   채   초콜릿을   입   안에   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찻잔에는   홍차까지   있는   걸   봐서   제대로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이   자식,   하비드가   감기에   걸렸다고   막   나가는   게   분명하다……!

‘당장   의자에서   내려와라!   주교님이   왔단   말이다!’

내가   무언의   손짓으로   의사를   전해봤으나   엘프는   붉은   눈동자를   멀뚱거리며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우물우물.   복스럽게   부풀려진   볼이   왜인지   가증스럽게   다가온다.

나는   참을   인   자를   되새기며   스르르   문을   닫았다.

그걸   의아하게   여긴   레비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테오라드   가주님?   왜   그러십니까.”

“그게   말입니다…….”

무어라   변명해야   하나.

엘프   노예가   초콜릿을   독식하고   있어서   대접을   못   해드리겠다고?   말도   안   된다.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으니   그만   돌아가   보시라고?   최악이다.

결국   응접실에   들어가긴   해야   할   터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반쯤   체념한   내가   응접실의   문을   도로   열었다.

그리고   짐짓   놀라고   말았다.

방금까지   테이블   앞에   앉아서   초콜릿을   주워   먹고   있던   엘프가,   테이블과   거리를   둔   채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세요,   주인님.   레비함   주교님도요.”

어제의   연장선인가.   어쩐지   ‘혹독한   체벌’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에   내   장단을   맞춰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심   안도한   내가   레비함을   이끌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하하.   기특하지   않습니까?   레비함   주교님이   저택   안으로   들어오시는   걸   보고   제   노예가   다과를   미리   준비했나봅니다.”

“그렇군요.   참으로   교육이   잘   된   노예입니다.   그런데…….”

들어오다   말고,   레비함이   속이   안   좋다는   것처럼   배를   매만졌다.

“화담하기에   앞서   화장실을   이용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제가   예배를   마치고   바로   와버린   터라   속이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아.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화장실까지   안내할   사용인을   한   명   붙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레비함은   부담스럽다는   듯   손을   저었다.

“다른   분에게   실례를   끼칠   순   없습니다.   저택에는   이전에도   몇   번   방문하였으니   화장실의   위치   정도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금방   갔다   올   터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대답하자   레비함은   내게   예의를   표하곤   열린   문   너머로   빠져나갔다.

혹시   내가   뭔가   실수한   게   있었나?   마음이   뒤숭숭한   와중에   누군가가   내   옷소매를   살며시   붙잡았다.   돌아보니   엘프였다.

“주인니임…….   저도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져서…….”

“건방진   년.”

매도를   해달라는   것으로   알아들은   내가   엘프의   귀를   붙잡아   위로   들어올렸다.

흐익-   익-   엘프가   까치발을   들고   눈물을   글썽인다.

“멍청한   것이   답도   없구나.   소변이   마려우면   그냥   화장실에   가서   누고   오면   될   것이   아니더냐.   그런   더러운   말을   왜   굳이   네   주인에게   말해서   기분을   잡치게   만드는   것이지?”

“죄소옹,   죄송해요옷…….”

“흥.   이번에는   봐줄   터이니   다음부터는   언행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라.”

내가   귀를   놔주자   엘프의   신음이   잦아든다.   귀를   잡아당긴   것이   생각보다   아팠던   것인지,   엘프는   자신의   귀를   매만지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제,   제에가   화장실을   써도   되는   건가요,   주인님?”

“당연한   걸   되묻지   마라.”

“히잉.   그럼   오늘부터   화장실을   쓰도록   할게여…….”

고마워요   주인님.   작게   중얼거린   엘프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열린   문을   통해   나간다.

대수롭지   않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뒤늦은   깨달음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오늘부터?’

그럼   지금까지   소변을   어디에   누고   있었다는   것인가.

설마,   아버지의   석상에   계속……?

‘아니.   아니겠지.’

속단하지   말자.

엘프가   그   정도로   악마일   리는   없지   않은가…….

*

응접실을   빠져나온   레비함은   곧장   저택의   집무실로   향했다.

의심은   죄악이나   확신에   대한   검증은   죄악이   아니었음으로.

‘집무실이라면   보다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함타르신을   폐인으로   만들어버린   이유를   기필코   찾아내어   테오라드를   종교   재판에   회부하리라.

굳은   결심으로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레비함은   멀리가지   않아   테오라드의   타락을   마주할   수   있었다.

‘마녀의   수정구?’

집무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수정구는   분명   마녀의   것이었다.

겉면에   새겨진   표식이   그리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침음을   흘리며   수정구에   가까이   다가간   레비함은   또   다른   의미로   놀라고   말았다.

‘이   표식은   독월   조합장의   것이   아닌가?’

수정구의   겉면에   붉게   칠해진   역십자가   모양의   표식.   넝쿨   장미가   역십자가를   휘감고   있는   모양은   독월   조합장의   고유   표식이   확실하였다.

‘테오라드가   독월   조합장과   손을   잡았다?’

둘   사이에   대체   어느   연관점이   있기에   유착   관계를   맺었다는   것인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왜인지   모를   불길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혹여   대량   살상   무기라도   거래한   것인가?   교단을   무너트리기   위해?’

겉으로는   신실한   신자를   연기하고   있었으면서   속으로는   이런   음계를   꾸미고   있었을   줄이야.

당장   교단에   알려   기사단을   파견시키고   싶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아직   증거가   부족하다.

발푸르기스의   밤에   맺은   맹약   때문에   마녀와   거래를   한다고   무작정   이단으로   몰수는   없었으니까.

‘나머지는   일단……   나중에   살펴보는   게   좋겠어.’

화장실을   간다고   했으면서   시간을   너무   오래   끌면   의심을   받을   것이다.

웃는   낯의   이면에   수백   마리의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테오라드에게   의심을   받는다면   돌이킬   수   없어진다.   자신이   함타르신처럼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당장은   후퇴하고   후일을   도모하는   게   수지타산이   맞았다.

레비함은   자신이   집무실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아무런   물건도   만지지   않은   채   집무실을   나왔다.

소리가   나지   않게끔   살며시   문을   닫은   후   몸을   돌린   레비함은,   예상치   못한   만남에   헛숨을   들이켰다.

“헤에…….”

테오라드의   노예인   엘프가   복도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집무실에서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거긴   화장실이   아닌데에…….”

말꼬리를   늘리면서   한   발자국씩   다가오는   모습이   소름끼치게   다가온다.

단순히   하찮은   노예가   걸어오고   있는   것뿐인데,   주변의   공기가   무거운   적막에   휩싸이고   있었다.

발이,   손이,   입술이   전혀   움직이지를   않는다.

분위기에   압도당했다는   표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이상하네요.   레비함   교구장   주교님이   왜   주인님의   집무실에서   나오는   걸까요?”

뚜벅뚜벅.

가벼우나   결코   가볍게   여길   수는   없는   발걸음이   지근거리에   닿아   멎는다.

레비함은   식은땀을   흘리며   코앞으로   다가온   엘프를   응시하였다.

‘너는……   노예가   맞는가?’

이쪽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엘프의   시선은,   도저히   노예에게서   나올   수   있는   기세가   아니었다.

오만하며   권위적이고,   패도적이며   흉악하다.

마치   지금의   침묵은   자신이   베풀어주는   유일한   배려라고   일컫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지쳤다는   듯   엘프가   나른한   억양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대답하셔야지요.”

아름다운   은발   아래,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가   모종의   광기를   머금은   것처럼   번뜩였다.

“제가,   묻고   있잖아요?”

덕분에   레비함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상황이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눈앞의   레비함이   무슨   말을   꺼낼까.

엘프는   그것이   참으로   궁금하였다.

‘어서   변명을   해.   예전의   너희가   그리하였던   것처럼.’

엘프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혐오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제아무리   선의로   무장한   인간이라고   해도   속을   들여다보면   자기기만이자   위선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여태   모든   전쟁은   인간으로부터   촉발되었고,   살인과   약탈,   폭력과   폭언,   욕망과   탐욕이   인간   사회에   아주   당연한   것처럼   눌어붙어   있었다.

그러니   인간이란   믿을   수   없는   종족인   것이다.

정을   주면   이용하려   하고,   이상을   이뤄주면   더   높은   이상을   요구한다.

지배당하기를   원치   않으면서   지배하는   것은   그   누구보다   좋아하는,   인간은   그야말로   이기심에   잡아먹힌   이율배반적인   종족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역겨운   족속은   다름   아닌   성직자였다.

─   인간의   마음을   희롱하고   악마와   결탁한   마녀들을   신의   이름으로   처벌하라!

엘프는   기억한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신을   믿는다는   성직자들이   ‘신의   이름’으로   벌인   끔찍한   대학살이자   광기를.

잘못이   없는   마녀가   이단   심판관들의   칼날에   뭉텅이로   죽어나갔다.

마녀가   아닌   자들도   교단의   미움을   받는   순간   마녀로   낙인찍혀   명을   달리하였다.

비명과   선혈이   난무하는   시대.   그러나   그것에   대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정신   나간   세상.   현세에   펼쳐진   지옥이   바로   제국에   있었다.

그   광경을   더는   목도할   수   없었던   엘프는   정체를   숨기고   교단의   높은   사람들을   만나   감정에   호소하였다.   이성을   담아   열변하였다.

비인간적인   행위를   당장   멈추라고.   마녀는   인간의   마음을   희롱하지   않았으며   악마와   결탁하지   않았다고.   이   모든   것은   오해로   빚어진   참극이라고.

그러나   교단의   높은   인간들은   엘프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역정을   내며   엘프를   몰아붙였다.

─   이   문서를   보고도   발뺌을   할   셈인가!   교한지옥(骄悍地狱)의   대공인   엘리고스가   마녀와   결탁하여   제국을   공격하겠다는   내용이   여실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대악마   바알의   인장까지   찍혀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음이라!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문서는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마계의   공문서였다.

출처가   명확하지   않으니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없고,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없으니   진의를   가릴   수   없음에도   교단은   자신들의   생각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제야   엘프는   알   수   있었다.   교단은   처음부터   진실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교단은   민중을   단합시키고   마계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는   것으로   얻어지는   반사이익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아마   교단   내부에서만   결정한   일이   아닐   것이다.   황실은   물론이고   황실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정계의   인물들과   재계의   부호들이   ‘마녀   사냥’에   거미줄처럼   엮여있었으리라.

─   그러니   말리지   마라!   거짓된   혀를   입   밖으로   내밀지   마라!   빛의   신께서   원하신다!   우리는   신의   뜻을   받들어   신성한   제국에   기생하는   수많은   마녀들을   박멸하리라!

고위   성직자들이   신의   이름에   대고   외치자   광기가   제국에   전염병처럼   돌았다.

마녀들은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살고자   자백하였다.   그러나   마녀라는   이유로   죽었으며,   인간을   도우며   살고   있던   마녀조차   자신이   손수   도와줬던   인간들에   의해   죽어나갔다.

밀고가   성행하자   마녀를   전문적으로   죽이는   현상금   사냥꾼들이   득세하였다.

낮에   밭을   일구던   농부들은   밤이   되면   부지깽이를   들고   마녀를   찾아다녔으며,   기사들은   마녀를   많이   죽일수록   훈장을   받았다.

이대로라면   제국에서   마녀는   모두   몰살당할   것이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마녀들은   제국을   떠나   마계의   일곱   지옥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어진   것이다.

하여   모든   마녀가   우울함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무렵,   한   어린   마녀가   남아있는   마녀들을   규합하였다.

─   이   병신들아!   다들   뭐하고   있어!   이대로   죽을   거야?   나는   허무하기   죽기   싫어!   이대로   사라지기   위해서   마녀가   된   게   아니라고!   나는   살고   싶단   말이야!

스스로를   ‘드레메스’라   밝힌   소녀는   폭거에   앞장서서   싸우자고   주장하였다.   수많은   마녀들이   드레메스의   말에   동의하였고,   준동하였다.

그건   엘프   또한   마찬가지였다.   불합리에   맞서,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가엾은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었으니까.

─   나는   잘난   남자   만나서   처녀막   뚫리고   싶은   거지,   교단   개새끼들의   창에   배때기   뚫리고   싶은   게   아니라고!   왜   내가   죽어야   하는데?   왜   너희가   죽어야   하는데?   다들   아무   잘못도   안   했잖아,   시발!   안   그래!?

드레메스의   주장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마녀들은   제국   전체에   만연한   혐오에   더   이상   당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렇게   제국에서는   대대적인   내전이   발생하였다.

마녀들   스스로가   개발한   개성   마법들로   교단의   각   지부를   테러하였으며,   자신들을   잡으러   온   인간들을   죽여   흑마법의   연성   제물로   사용하였다.

거기다   평소   교단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과   돈   냄새를   맡은   용병들이   마녀의   편에서   합세하기   시작하여   제국   전역에   국지전이   일어났다.

꺼져가던   불꽃이   장작을   만나   거칠게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더   이상   일방적인   탄압을   할   수   없다고   여긴   교단은   황실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황실에서   돌아온   대답은   교단에서   원하는   방향과   정   반대였다.

─   처음부터   너희들이   벌인   짓이지   않더냐.   황실에   책임을   전가하지   말라.

중앙집권을   원하는   황실에게   있어   교단의   힘이   위축되는   것은   바라마지   않는   일.   굳이   교단의   편을   들어   피해를   감수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위기감을   느낀   교단은   결국   마녀와   타협하고   말았다.

그   유명한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서로의   자유와   마녀의   권리를   종교를   초월한   국가   단위로   인정한   것이다.

이제는   수십   년이   지나버린   과거일   뿐이지만,   타   종족보다   기억력이   월등히   좋은   엘프는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일이   바로   어제처럼   기억난다.

그래서   사제복을   입은   녀석들을   보면   역겨움이   절로   치밀어   올랐다.

일전에   이단   심판관이   저택을   찾아왔을   때에도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이제는   교구장이라는   녀석이   찾아와서   별   해괴한   짓을   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목을   분질러   죽여버리고   싶었으나   간신히   참아내었다.   눈앞의   성직자는   어디까지나   테오라드의   ‘손님’이니까.

‘손님을   죽이는   것은   노예로서   옳지   못한   일이야.’

테오라드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장난감을   고장   내고   싶지   않았다.

아직   제대로   된   유희도   즐기지   못하였고,   과거의   테오라드가   내뱉었던   말이   진심인지   확인하지도   못하였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단순한   협박만   할   생각이었다.   눈앞의   성직자가   엄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끔.

“혹시   집무실을   화장실이라   착각하시고   잘못   들어가신   건가요?”

엘프가   한결   누그러진   어투로   말하자   레비함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상대방이   이쪽을   해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착각…….”

그런데   착각이라니.

마치   이번   한   번만은   눈감아   줄   터이니   거짓을   고하라는   것처럼   들렸다.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선택지가   있는   건   아니었다.

이   엘프가   테오라드에게   바른대로   말해버린다면   입장이   상당히   난처해질   테니까.

고개를   든   레비함이   태연하게   웃었다.

“그러네요.   오랜만에   저택을   방문했더니   화장실의   위치를   착각했나   봅니다.”

“흐응.   그러게   주인님이   사용인을   붙여주셨을   때   알겠다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하하.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제   기억을   너무   맹신했나   봅니다.”

“어쩔   수   없네요.   제가   화장실까지   안내해드릴   테니까   제   뒤를   따라오세요.”

엘프가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또각거리는   발걸음   속에서,   허리   아래까지   늘어트린   은발이   잔물결을   이루며   부드럽게   흔들린다.

“아.”

그러다   마침   생각났다는   것처럼   발걸음을   뚝   멈추고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레비함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앞으로는   저택   안에서   경거망동하지   않으시길   바랄게요.   주인님께서는   자신의   취미가   들통   나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시거든요.”

주인님의   취미라.   레비함은   엘프의   말을   곱씹으면서   최대한   여상하게   대답하였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

홍차가   다   식는다.

찻잔   위에   손을   올려봐도   열기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초콜릿도   슬슬   녹아내리는   터라   곤란하다.

‘대체   언제   오시는   거지.’

화장실에   갔다가   온다면서   둘   다   너무   늦다.   변비라도   걸린   걸까.

시큰둥하게   찻잔을   매만지고   있으니   불현듯   반대편   문이   열렸다.

레비함이   엘프와   함께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는   터라   내가   화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교님!   용변은   잘   해결하셨습니까?”

“히잉.   저는   왜   안   물어보세여   주인닝…….”

옆에서   엘프가   혀   짧은   목소리로   칭얼거렸지만   가뿐히   무시하였다.

레비함은   엘프를   한   번   흘겨보더니   조금   곤란한   투로   말했다.

“용변은   잘   해결하였는데   엄한   걸   먹었는지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아.   그런   거라면   저택의   상비약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레비함이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상비약까지   갈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그저   잠시만   눈을   부치면   될   것   같아서요.   혹여   방을   하나   빌려도   되겠습니까?”

“에…….   주교님은   그냥   돌아가시면   안   되나요?”

이번에도   엘프였다.   짜증스런   낯이   심히   무서워서   괜히   내   몸이   움찔   떨릴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주교님한테   저딴   말을   내뱉는   건   아니지   않은가!

기겁한   내가   성큼   걸어가서   엘프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   당연히   괜찮습니다.   제   노예의   말은   신경   쓰지   마시고   빈   방에   들어가셔서   잠시   눈을   부치시지요.”

“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만   신세를   지겠습니다.”

내게   목례한   레비함이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것처럼   방을   빠져나갔다.

그   행동이   너무나   확고하여서   언뜻   무례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정말로   주무시고   가실   건가?’

주교님이   다른   가문의   저택에서   자고   갔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는데.

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따스하면서도   촉촉한   감촉에   흠칫   놀라며   손을   떼내었다.

아니나   다를까   손바닥에는   침이   묻어있었다.   내가   입을   틀어막자   혀를   이용해서   내   손바닥을   열심히   핥은   것이다.

솔직히   말해   조금   소름끼쳤다.

“어처구니가   없군.   발정이라도   난   것이냐.”

내가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자   엘프가   내   쪽으로   가볍게   달라붙었다.

양   가슴이   내   어깨에   부드럽게   눌려지는   터라   표정관리가   힘들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아서   두려움이   엄습한다.

“주인님.”

평소보다   조금   더   애정을   담아   내   명칭을   부른   엘프가,   내   팔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포근히   끌어안았다.

“주인님의   좆   물을   받아마시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천박한   암퇘지한테   벌을   주실   차례가   오지   않았나요?”

아…….   뭔가   했더니   이거   때문이었구나.

하지만   나는   아직   마녀에게서   온   성인용품이   뭔지도   확인하지   못했는데.   무턱대고   성고문을   시작하겠다고   했다가   제대로   된   매도를   행하지   못하면   내   목숨이   위험하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기한을   하루정도   미루는   것이   좋았다.

“짜증나게   굴지   마라.   벌을   줄   것이나   벌을   주는   일시는   네가   아니라   내가   정하는   것…….”

엘프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진다.   무표정   속에   들어선   살기가   내   어깨를   움찔   떨게   만들었다.

뭔가,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면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위기를   직감한   내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입매를   비틀었다.

“……지금   당장   시작하도록   하지.   집무실로   올라갈   터이니   따라와라.”

응접실에서   빠져나온   레비함은   저택의   빈   방을   찾아   들어갔다.

그러나   한가하게   잠이나   청하고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앞으로는   저택   안에서   경거망동하지   않으시길   바랄게요.   주인님께서는   자신의   취미가   들통   나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시거든요.

엘프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지만   레비함은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잠자코   있으라고?   참으로   교만하고   어이가   없는   소리였다.

테오라드가   마녀   조합장과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   이상,   빛의   신을   모시는   종복으로서   그냥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가로되   과거부터   현재까지,   신께서는   이단을   색출하여   처벌하라   하였다.

테오라드가   이단의   낌새를   보이고   있는   이상   레비함은   자신에게   내려진   신명을   거부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모든   건   신의   뜻이리라.’

엘프의   기세가   두렵긴   하였으나   물러설   순   없었다.

신의   뜻을   받들어   세상을   보다   이롭게   만드는   것에   일조할   수   있으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맹세한   것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또한   성직자가   된   날,   신의   자비   아래에서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겠다고   서원하였으니   응당   그리   행동하는   것이   맞았다.

하여   레비함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복도의   소음에   집중하였다.

집무실로   향하는   경로에   있는   빈   방을   빌렸기에   테오라드가   지나간다면   분명히   발걸음   소리가   들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레비함의   예상대로,   오   분   정도가   지나자   복도에서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문제는   그   옆에서   구두굽이   또각거리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는   것이다.

─   죄송해요,   주인님.   저   때문에   괜히   수고로움을   겪으셔서.

─   이제와   새삼스럽게   네   덜떨어진   머리를   자랑하지   마라.   이번   기회에   네   무능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줄   터이니.

─   저,   저는   그저어…….

─   쓰레기가.   변명하지   마라.

한   명은   엘프.   다른   한   명은   당연하게도   테오라드였다.

덕분에   레비함은   잠시   아연해졌다.

‘노예를   데리고   집무실에?’

레비함은   귀족   가문의   생리에   빠삭하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의   지식은   갖추고   있었다.

보통   귀족   가문은   가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집무실에   노예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   집무를   보는   공간   자체를   신성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정함의   상징인   노예를   굳이   집무실까지   들이지는   않는   것이다.

제아무리   망나니라고   해도   지키는   관례일진데,   명망   높은   데하름   가문의   가주인   테오라드가   선조들의   규칙을   깨트린   것은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역시   대외적으로   내비치는   선의는   가면인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저   엘프가   사실은   노예로   위장한   암흑가의   세력들   중   한   명일   수도   있었다.

다소   어이없는   판단이었지만   독월   조합장과   유착하고   있는   테오라드라면   충분히   생각해볼만한   가능성이었다.

하나   모든   것은   심증에   불과할   뿐.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테오라드의   입에서   나오는   진심을   엿들을   필요가   있었다.

끼이익─

조심스레   문을   연   레비함이   복도를   살펴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걸어가고   있는   테오라드와   엘프가   보인다.

테오라드는   엘프와   무어라   말을   몇   마디   주고받고는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고,   엘프가   그   뒤를   따라서   집무실에   입장하였다.

일반적인   노예라면   제   주인의   집무실에   들어가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법도   한데,   엘프의   행동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이런   행위가   자주   있었다는   것인가.’

대체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되기에   집무실에   단   둘이   들어가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증은   의혹을   낳았고,   의혹은   곧   흔들리는   실마리처럼   레비함을   유혹하였다.

침을   꿀꺽   삼킨   레비함은   복도로   나와   집무실로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기척을   죽인   채   방문에   귀를   대었다.

집무실에   있는   둘   사이에서   어떤   말소리가   오가는지,   그로인해   촉발되는   거대한   음모가   무엇인지   알아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망했다.

“음…….”

엘프를   데리고   기세등등하게   집무실에   들어오긴   했는데,   집무   책상   위에   놓인   정체불명의   양동이가   대체   무슨   용도인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수정   구슬이   사라진   것을   보면   제품이   제대로   왔다는   것일   터인데.   철제   양동이를   대체   어디에   쓰라는   소린가?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양동이   옆에   리본으로   포장된   상자가   하나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지이이이잉─

저게   대체   뭐냐는   듯   쳐다보는   엘프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간식   시간을   앞두고   있는   강아지처럼   설렘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만약   엘프에게   꼬리가   있다면   지금쯤   맹렬하게   흔들리고   있겠지.

내가   과연   저   기대감을   만족으로   바꿀   수   있을까…….

곁눈질로   엘프를   흘겨본   내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집무   책상으로   걸어갔다.

“마침   내가   주문했던   물품이   도착했군.   물건을   확인할   터이니   너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네에…….”

엘프에게   대기   명령을   내린   내가   심호흡을   하며   상자의   리본을   풀었다.

덮개를   열자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망측한   물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설명하자면   옷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천의   면적이   적은   속옷과   머리띠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알약,   끝부분이   동그란   막대   하나와   가죽으로   된   채찍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평생   이런   물건은   가까이   두지도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는데.   어쩌다   엘프에게   홀려서   이런   짓까지   하게   된   것인지.

스스로에게   조소한   내가   상자의   구석에   위치한   종이를   꺼내들어   펼쳤다.   드레메스가   동봉하여   준다던   사용설명서였다.

『테오라드   데하름   가주님께.

안녕하세요,   테오라드   가주님?   저희   가게를   이용해주신   것에   대해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저   계속해서   존대를   쓸   필요는   없죠?   그렇죠?

베이넌   그   개   버러지   같은   놈이랑   가주님이랑   생각이   같다고는   할   수   없는   거니까요.

그래도   가주님의   생각을   제가   알   수는   없으니   일단   여기에는   존대를   쓰도록   할게요.

말이   길었는데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제가   테오라드   가주님에게   드린   성인용품은   일명   ‘젖소   세트’라고   불리는   상품이에요.

젖소   아시죠?   젖통에서   우유   내뿜는   동물   말이에요.

아신다면   이해가   빠르실   거예요.   이건   말   그대로   여자를   젖소처럼   만들어   주는   물건이라.

각설하고,   상자를   잘   살펴보시면   알약   하나가   있을   거예요.

해당   알약은   ‘모유환’이라고,   복용하게   되면   모체의   유선에서   유즙이   분비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젖통에서   우유가   나온다는   소리에요.

복용한   사람이   흥분하면   흥분할수록   더   많은   우유가   나오는데,   맛은   솔직히   말해   잘   모르겠네요.

맛없다는   사람도   있고   맛있다는   사람도   있는   거   보니까   아마   복용한   사람의   체질에   따라   다른가   봐요.

나머지는   딱히   설명   안   해드려도   되죠?   알아서   잘   하실   거라고   믿어요.

아.   그리고   노파심에   말씀드리는데   이왕   변태   플레이를   하실   거면   최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임하세요.

여자는   몸으로만   느끼지   않아요.   머리로도   느끼고   마음으로   느끼고   분위기로도   느껴요.   남자가   스스로의   행동에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걸요?

추신.   베이넌   그   시발   놈한테   조만간   진짜,   진심으로   죽여버리겠다고   전해주세요.

독월   조합장   드레메스   올림.』

사용설명서를   가장한   편지를   다   읽은   내가   심란한   마음으로   종이를   접었다.

‘모유가   나오는   알약이라니…….’

정녕   이   사람과   내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게   맞는   걸까.

내가   모르는   세계에서는   이런   해괴망측한   물건이   수시로   발명되고   있었구나.

어쩐지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있던   색채가   한층   더   낮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주인님?”

하지만   우울해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저   엘프를   만족시키는   것에만   집중해야   했으니까.

우선   본격적인   성고문에   앞서   제품   설명이   먼저였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과정은   필수적으로   거쳐야한다.

‘일단은…….’

가장   무난한   것(솔직히   말해   무난한   게   없지만)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상자를   들고   엘프에게로   몸을   돌린   내가   속옷과   머리띠를   꺼내   집어던졌다.

툭.   엘프가   제   발치에   던져진   속옷과   머리띠를   의아하게   바라볼   때,   내가   설명을   시작했다.

“네   년이   체벌을   당할   때   입을   복장이다.   불만인가?”

“하,   하지만   이건   너무   야해서어…….”

“나의   성욕처리개로   태어난   주제에   복장이   야하다고   입지   않을   셈인가?”

“그건   아니에요…….”

반응을   보니   적당히   만족한   것   같았다.   그럼   이어서   가보도록   하자.

내가   상자에서   알약을   꺼내   들어올렸다.

“이건   네가   먹을   약이다.   임신하지   않아도   모유가   나오게   하는   약이지.   내가   특별히   주문하였다.”

특별히   주문했다고   하는   것으로   나의   준비성을   강조하였다.

그게   마음에   든   모양인지   엘프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린다.

“싫어어…….   주인님은   정말로   귀축이세요…….”

“다물어라.”

두   번째도   통과.   기세를   탄   내가   알약을   내려놓고   채찍을   꺼내들었다.

“혹여   네가   말을   안   들을   때를   대비하여   채찍을   준비하였다.   맞으면   꽤나   아플   것이다.”

“싫어어어엇……!”

거듭된   통과에   내   입가가   절로   씰룩인다.

낙승이잖아   이거?   잘만   한다면   오늘   엘프를   제대로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한동안   매도에서   해방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야말로   천국이지   않은가!

행복의   나래를   펼친   내가   마지막   물건을   자신   있게   꺼내들었다.

끝자락이   동그랗게   마모되어   있는   막대.   용   얼굴로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보니   이게   아마   드레메스가   말한   용두(龙头)인   모양이었다.

사용처는   뭐…….   알만하였다.

“이건   네가   계속해서   말을   안   듣는다면   음부에   박아   넣을-”

“싫어.”

어……?

말을   끊긴   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봐도   저건   통상의   ‘싫어’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싫어하고   있는   게   표정으로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냉각되고   있었다.

입에서   한기어린   숨결까지   흘러나올   정도라   도저히   반박이   불가능하다.

공포에   잠식당한   나는   짧은   침묵   끝에,   하하하   웃으며   용두를   뒤로   집어던졌다.

“농담이었다.   네   천박한   음부를   희롱하는   것에   시간을   버리고   싶지는   않군.”

그제야   한기가   걷히고   엘프의   표정이   풀어진다.   방금까지   세차게   노려본   주제에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울먹이는   모습이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는다.

하나   내색해서야   내   생명과   가문,   식솔들의   안전이   위험해진다.   나는   목의   브로치를   매만지면서   최대한   비열하게   읊조렸다.

“벗어라.   천박한   복장으로   갈아입는   것으로   내게   복종을   표하라.”

“네엣…….”

다행스럽게도   엘프는   군말   없이   내   말에   따랐다.

프릴이   달린   헤어밴드를   벗고   앞치마를   풀어헤친   엘프가   자연스럽게   겉옷을   벗어   내린다.

어깨의   쇄골이   가장   먼저   드러나고,   매력적인   굴곡을   이루고   있는   가슴이   다음으로   보였다.

분홍빛의   유두와   잡티   하나   없는   뽀얀   살결은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남심을   매혹시킨다.

양   가슴을   보라는   듯이   드러낸   엘프는,   은근한   눈짓으로   나를   흘겨보며   메이드   정복을   모두   벗어버렸다.

스르르   흘러내린   옷가지가   엘프의   종아리에   걸쳐   잔망스럽게   늘어진다.

“…….”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의   몸.   엘프는   자신을   봐달라는   것처럼   잠시   가만히   있다가,   허리를   숙여   속옷을   주워들었다.

의도한   것인지   그   속도가   무척이나   느린   터라,   나는   엘프의   가슴이   중력에   의해   살며시   처지다가   도로   올라오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요염하며   야하다.   도저히   대수림의   고귀한   지배자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엘프의   몸짓은   세세한   부분까지   내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덕분에   의지와는   상관없이   숨이   거칠어진다.   엘프는   내   미묘한   변화를   눈치   챈   것인지,   붉은   눈동자에   장난스러움을   담아   읊조렸다.

“잘   부탁드릴게요.”

오만하며.

또한   고고하게.

“나의   주인님.”

엘프는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

두근거리지   않았다면   아마   거짓일   것이다.

눈앞의   엘프는   객관적으로   볼   때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외양이   수려하니까.

그렇다고   해도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면   안   된다.   내가   순간의   정욕을   참지   못하고   엘프를   덮치게   된다면,   그건   에실리와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이건   엘프와의   전쟁이다.   정신   차려.’

패전하여   정조를   잃는다면   면목이   없다.   살아갈   명예가   실추된다.

에실리를   위해서라도,   나를   위해서라도.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절대로.

책상을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이를   꽉   깨무는   것으로   심경을   진정시킨   내가   아무렇지   않다는   것처럼   턱을   치켜들었다.

“잘   부탁?   네   년은   내게   체벌을   청하는   것이   아닐   텐데   어째서   그딴   소리를   내뱉는   거지?”

“엣.   죄송해여어…….”

손바닥   뒤집듯이   표정을   바꾼   엘프가   속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한다.

덕분에   나는   한숨을   돌리며   눈을   감았다.

‘아름다운   외양에   속지   말자.’

엘프의   속셈은   나를   자신의   장난감으로   만드는   것.   순순히   응해줘서야   평생을   꼭두각시로   살   뿐이었다.

나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서,   엘프의   장난감으로   전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끝까지   저항하여   너를   저택에서   내쫓을   것이다.   다시는   나를   장난감으로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수모를   안겨줄   것이다.

그러니   나를   만만히   보지   마라,   엘프……!

“다   입었어요,   주인님.”

감미로운   음색에   눈이   떠진다.

동시에   나는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아니,   이거…….’

옷이   맞는가?

젖소의   얼룩무늬가   배경으로   들어간   천   쪼가리가   엘프의   음부를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었다.

팬티가   음부에   꽉   달라붙어서   벗고   있는   것과   별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일단은   가리고   있다는   점에서   백   번   양보하여   옷이라고   부를   순   있었다.

그런데   위쪽은   아무리   생각해도   옷이   아니었다.   양옆으로   벌려진   천   쪼가리가   유두의   주변을   감싸고도는   형태라서,   볼록   튀어나온   유두가   무척이나   강조되어   보였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제정신이   아니군.’

단지   입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격을   두   단계는   추락시킨다.

제정신이여서야   이런   걸   속옷이라고   내놨겠는가.   망측한   것이   정도   이상을   넘으니   흉악할   정도다.

그나마   용납이   되는   것이라고는   젖소의   귀를   닮은   머리띠뿐이었다.

“저어…….”

엘프도   자신이   입은   괴상망측한   속옷이   부끄러운   것인지,   아니면   부끄러운   척을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계속   지켜보고   있자   얼굴을   붉히며   가슴을   가렸다.

“이런   건   처음이라서…….”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며   수줍음을   머금는   연기가   일품이었다.

엘프의   속내를   훤히   아는   내가   아니었다면   요조숙녀라   여겼을   정도로   청순하다.

그러나   엘프의   청순은   가면일   뿐.   내가   손을   들어   거만하게   까딱거렸다.

“이리로   와라.”

“네에…….”

순순히   다가온   엘프를   향해   내가   알약을   들어올렸다.

“입을   벌려라.”

엘프가   입을   벌려   혀를   내민다.

내가   그   안으로   알약을   집어넣은   순간,   엘프가   당연한   것처럼   입을   닫아버렸다.

“뭐하는……!”

엘프의   구강에서   채   빠져나오지   못한   내   손가락에   혓바닥이   닿는다.

“휴웁,   쭙…….”

순진한   양처럼   내   손가락을   빨아대고   있는   모습이   무언가   소름끼쳤다.

급히   손가락을   빼내자   침으로   이루어진   실타래가   길게   늘어진다.

내가   당황하는   사이,   엘프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벌려   알약을   먹었다는   걸   보여주었다.

“주인님이   주신   야한   거,   다   먹어버렸어여…….”

고작   알약   하나   먹은   거잖아!

따지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신   양동이를   들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마녀가   이걸   왜   줬는지   대충   예상이   갔기   때문이다.

“무릎을   꿇어라.   지금부터   착유(搾乳)를   시작하도록   하지.”

“주,   주인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왜?   싫은가?   암퇘지에서   젖소로   신분   상승을   시켜줬더니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지?”

“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문   엘프가   기어들어가듯   말했다.

“저는   짐승이   아닌   걸요…….”

뭐냐   이건.

예상치   못한   반응에   침묵하며   머리를   굴리던   나는   뒤늦게   채찍을   떠올렸다.

아마   이걸   사용해달라는   신호일   것이다.

“네가   짐승이   아니란   말인가.”

상자에서   회초리   형태의   채찍을   꺼내든   내가   엘프의   몸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타격   지점을   찾기   위해서였다.

‘팔?’

아니다.   살갗이   옅은   부분은   혹시나   상처가   날   수   있었다.   피가   안   나는   상처정도는   용납하는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르니   피해두자.

‘등과   다리도   마찬가지.’

결국   남은   건   엉덩이밖에   없었다.   지방이   많은   부분이라   멍이   들지언정   상처가   날   위험은   적었으니까.

“그럼   다시   한   번   물어보지.”

뚜벅뚜벅.

의도적으로   엘프의   뒤로   걸어간   내가   엘프의   엉덩이를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엘프의   온몸이   경련하듯   움찔거렸다.

“헤윽!”

“이래도   네가   짐승이   아닌가?”

“저,   저는   짐승이   아닌…….”

원치   않지만   한   번   더,   채찍으로   엘프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흐갹!”

“이래도   짐승이   아닌가?”

“아,   아니에요.   저는   짐승이   맞아여어…….”

채찍   자국으로   붉게   물든   엉덩이를   여실히   드러낸   채   울먹거린다.

계속해서   채찍을   사용해야   되나   싶었던   내게   있어서는   다행이었다.   누군가를   때리는   것은   내게   있어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스스로가   짐승이라는   걸   인지했으면   무릎을   꿇어라.   착유를   시작하지.”

“흐윽,   네에…….”

엘프가   무릎을   꿇고   상체를   앞으로   숙여   양동이   위에   가슴을   걸친다.   나   또한   채찍을   내려놓고   엘프의   등에   포개듯이   앉았다.

정면에서   얼굴을   마주보는   것은   조금   무서웠음으로   지금의   내게   있어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낮게   심호흡을   한   내가   엘프의   가슴을   받쳐   들었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내가   뒤에서   엘프를   껴안는   자세가   되어버렸다.

엘프는   어깨를   움찔   떨더니   수줍은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주인닝……   부끄러워여…….”

“닥쳐라.”

너만   부끄러운   게   아니다.   나도   여러   가지   의미로   부끄러웠다.

정신   나간   속옷을   입은   채   가슴을   드러낸   엘프에게   모유가   나오는   알약을   먹인   뒤에   착유를   시작하려고   하다니.

그것도   선조님들의   그림이   걸려있는   신성한   집무실에서   말이다…….

가주   실격이었다.   당장   열거할   수   있는   죄목만   해도   다섯   개는   넘는다.

하나   이   모든   것은   역설적이게도   가문을   위해서였다.   나는   눈물을   머금으며   엘프의   가슴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하구으…….”

미약한   신음소리가   손끝을   타고   전해진다.   살짝   움켜쥔   것뿐인데도   부드러운   살덩이는   세상   그   무엇보다   감미롭게   내   손아귀에   안겨들었다.

만지고   있는데도   더   만지고   싶을   정도로   좋다.   아마   상대가   엘프만   아니었어도   지금의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창녀와   다를   바가   없군.   이런   꼴을   당하면서도   느끼고   있는   것이냐?”

“아,   아니잇……!?”

엘프의   가슴을   좀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   상태에서   가슴을   천천히   주무르며   검지   끝으로   유두를   살짝   살짝   매만졌다.

여태   베이넌한테   들은   여러   음담패설에서   착안한   몸짓이었다.

이게   통할까?   긴장을   유지하며   엘프의   옆모습을   살펴보자,   눈을   반개하며   입을   벌리는   모습이   보였다.

“주,   주인니…   으응,   읏.   그렇게   만져주시며언……   하우,   읏…….”

통한다!   잘을   모르겠지만   엘프는   내   손길을   통해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더해   유두에   새하얀   액체가   방울지어   맺히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차오른   나는   좀   더   저돌적으로   엘프의   가슴을   주물렀다.

만지면   만지는   대로   모양이   바뀌는   탄력   있는   가슴은,   내게   묘한   충족감을   가져다주었기에   나   또한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저어,   흐으읏……   느껴,   느껴버려서어…….”

거칠어지는   호흡이   수증기가   되어   뻗어   나온다.   유두의   첨단에서   방울지던   모유는   이제   하나의   줄기가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만   나오는   양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젖을   움켜쥔   내   손을   타고   흘러내릴   뿐이었다.

이래서야   양동이에   모유가   차기   전에   손만   더러워진다.

“만져진지   얼마나   되었다고   모유를   뿜어대느냐.   역시   너는   어쩔   수   없는   암퇘지인가.”

“그,   그게에…….”

반박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나는   집게손을   하여   엘프의   유두를   가볍게   꼬집었다.

“햑!?”

엘프가   깜짝   놀라서   몸을   떨자   모유가   분수처럼   뿜어져   양동이의   바닥을   적셨다.

“정정하지.   젖소가   따로   없군.”

모유환이   정확히   어떤   원리로   만들어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걸   보니   효과는   확실하였다.   정말   젖소처럼   우유를   뿜어내고   있지   않은가.

그게   의외로   재미가   있었던   바람에   나는   엘프의   양   유두를   붙잡고   꼬집듯이   잡아당겼다.   그때마다   모유가   뿜어지면서   엘프의   신음소리가   보다   간드러졌다.

“하윽,   그,   그만…   그만해엣……!   하아,   앗,   응,   흐으응…….”

싫다는   건   연기일까   진심일까.   뭐가   되었든   나쁘지   않았다.   몸을   부르르   떨면서   혀를   내미는   꼴을   보니   제대로   느끼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이어서   몇   번이나   더   젖을   짜내던   나는,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며   엘프의   가슴을   놔주었다.

“응,   앗…….”

양동이에   모유가   제법   모인   걸   보니   왜인지   모를   뿌듯함이   마음을   적셔온다.

‘가문   부지에   젖소를   몇   마리   키울까.’

실없는   생각을   하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엘프를   내려다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올이   엘프의   입술에   달라붙어   있는   게   보인다.

반쯤   풀어진   눈을   한   채   양동이에   가슴을   걸치고   있는   모습이   꽤나   추하였다.

유두에서는   여전히   모유가   찔끔찔끔   흘러나오고   있어서   전희의   쾌감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   이   정도면   되었겠지.   나는   모유가   묻은   손을   털어내며   혀를   찼다.

“이제   꺼져라.   체벌을   끝낼   것이니.”

“후으…….”

체벌을   끝낸다.   그   말을   들은   엘프가   스르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거칠어지는   호흡이   점차   진정되기   시작하더니,   이성을   되찾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주인님?   다시   말씀해주시겠어요?”

“……귀가   먹었느냐?   체벌을   끝낸다고   하였다.”

“끝……?”

되물음이   무섭다.   아직도   만족하지   못했단   말인가?

침착하게   머릿속의   주판을   굴리던   나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책상   앞의   의자로   걸어갔다.

생각해보면   아직   남아있는   매도   방식이   아예   없지는   않다.

의자에   털썩   걸터앉은   내가   오만하게   읊조렸다.

“양동이의   모유를   가져와라.   한   잔   마셔야겠군.”

자리에서   일어난   엘프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요?”

“뭐가   말이냐…….”

“제   모유를   마시고   난   뒤에는요?”

“그야   체벌을   끝내야…….”

엘프의   눈동자에   생기가   사라진다.

“헤에…….”

그러더니   내   명령도   없이,   또각거리는   구두소리를   흘리며   다가왔다.

“직접   마시는   편이   좋으실   텐데.”

나를   흘겨보는   붉은   눈동자에   담긴   위험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분위기가   일변하며   생존   본능에   경종이   울린다.   엘프가   한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사방이   어둠에   잠식당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움직일   수가   없다.   엘프의   눈을   마주보는   것도   두려웠다.   나는   그저   박제된   인형처럼   의자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발걸음이   멎는다.

“주인님은   제게   혹독한   체벌이라   말하셨잖아요.”

내가   낮게   침음을   흘렸다.

“저는   벌을   더   받아야   하는데…….”

엘프가   의자의   등받이를   붙잡는다.

그러며   고개를   숙여   나를   내려다보았다.   스르르   흘러내린   머릿결이   내   뺨을   간지럽힌다.

“주인님은   저에게   벌을   주기   귀찮으신가   봐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기저의식   깊숙한   곳에서   피어오른   원초적인   공포가   엘프에게   반항하지   말라   소리치고   있었다.

“이상해요.   계속해서   성욕을   참으시면   건강에   나쁘실   텐데.”

끈적거리는   목소리가   뇌리에   박히는   것처럼   다가왔다.

툭.   엘프의   유두에서   떨어진   모유   한   방울이   내   입술에   닿아   흘러내린다.

“주인님.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명심해주세요.”

내   손을   잡아끈   엘프가   자신의   아랫배를   만지게   만들었다.

“주인님의   성욕을   푸는   곳은,   이곳에   있어요.”

어딘가의   제왕처럼,   내   위에   군림하듯   말하는   엘프의   목소리가   절대적인   명령처럼   들려왔다.

이마저도   거절하면   나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엘프가   지금   내   몸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은   아직   ‘노예’라는   역할에   충실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나는   저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벌어질   참극을   원하지   않았기에…….

“다음에는,   명심하마.”

별   수   없이   패배를   인정하였다.

테오라드에게   경고를   전하고,   메이드   정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엘프는   문을   쾅!   닫으며   집무실을   나왔다.

‘짜증나…….’

문에   등을   기대고   한숨을   푹   내쉰   엘프가   찬연한   은발을   귀   뒤편으로   쓸어내렸다.

가라앉은   눈동자가   반개한   채   정면을   응시한다.   머릿속에는   테오라드가   겁에   질려   굳어있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너무   밀어붙였나   싶기도   하였지만,   장난감을   괴롭힌   사실보다   장난감이   자신을   여자로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왜인지   모를   분노가   올라왔다.

‘왜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보다   예쁜   여자가   어디에   있다고.’

오만한   판단이   아니었다.

수많은   세월을   살아온   엘프가   경험을   통해   내린   지극히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여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고,   이름을   나열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에서는   일국의   왕을   자빠트렸다는   미인도   있었다.   궁금하여   찾아가봤지만   글쎄.   그놈의   왕이   이쪽을   보고   대뜸   청혼을   해온   것을   볼   때에   승자가   어느   쪽인지는   명확하였다.

이후에도   많은   남자들의   구애가   있었다.

딱히   여자로서   기교를   부린   것은   아니었다.   그쪽에   관심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그저   인간으로   모습을   위장하여,   세상   전역을   돌아다니며   여러   지식을   배워가고   있으면   자연스레   남자가   꼬였다.   심각할   정도로   말이다.

─   실력이   대단하시구려.   하지만   그쪽이   알지   못하는   비전   마법이   내게는   있소.   궁금하다면   나와   좀   더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어떠오?   아직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마법이라   나를   통해서만   알   수   있을   거요.

─   내   평생을   살아왔지만   너처럼   아리따우면서도   현명한   여자는   보지   못하였다.   그러니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네게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   나와   함께한다면   말이다.

─   이번   임무를   끝내면   은퇴할   생각이야.   영지   변방에서   저택이나   하나   지어서   살려고.   이만큼   고생했으면   좀   쉴   때도   됐잖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는   어때?   우리가   마도구   거래로   만난   지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됐다지만,   나는   네가   마음에   들거든.

하찮은   남자들이   음흉함을   순진함   속에   숨겨가며   청혼을   해왔다.

엘프를,   절벽   위의   꽃을   꺾기   위해   몇   년씩이나   계속되는   구애를   한   남자도   있었다.

그러나   엘프는   모두   거절하였다.   거절해도   알아듣지   못하면   손가락을   분지르는   것으로   제   위치를   자각시켜   주었다.

그들의   마음이   진심이고   아니고는   상관없었다.   엘프는   인간의   감정을   믿지   않는다.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는   코웃음을   칠   정도였다.

사랑의   심지는   불타오르기   쉬운   만큼   꺼지기도   쉬웠으니까.

영원에   가까운   세월에   살아갈   수   있는   엘프에게   있어   인간의   사랑이란   번식을   위한   정신   작용이자   명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테오라드는   그   하찮은   사랑을   위해   본능을   한계까지   억제하고   있었다.

지금껏   몇   번의   매도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테오라드는   자신의   본능을   억누르고   절제된   행동만을   보였다.

철저히   계산된   움직임으로   이쪽을   만족시켜주려는   것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이다.

처음에는   그게   살기   위한   발버둥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약혼녀.’

에실리   펠가로인이라   했던가.

테오라드는   그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게   분명하였다.

때문에   다른   여자와   몸을   섞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겠지.

절개를   목숨처럼   지킨다는,   요조숙녀나   할법할   생각을   제국의   귀족이자   명망   높은   가문의   당주가   하고   있다니   우습지도   않았다.

그래.   정말로   우습지가   않아서,   괜스레   이가   갈렸다.

‘조만간이야,   테오라드.’

처음에는   장난이었지만   이제는   오기가   생긴다.

지금의   관계는   유지하되,   테오라드가   이쪽을   여자로   보게끔   만들어주고   싶었다.

더는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날뛰는   꼴을   보고   싶었다.

공포로   인해   계산된   움직임이   아닌,   본능에   의한   충동적인   움직임을   말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으나   몸을   섞게   될   날이   멀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고   반항할   순   없을   거야.’

예전에   몸을   섞으려   들었다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겠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정상참작이   가능할   것   같았다.

만약   테오라드가   이성을   잃고   자신을   범하려   든다면   꽤나   재밌을   것이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자기도   모르게   선을   넘는다면,   예전에   했던   약속이   그대로   깨질   것이니   더는   참지   않아도   되겠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쓰게   웃은   엘프는   문에서   등을   떼고   복도를   걸었다.

또각거리는   구두소리를   흘리며   걸어가던   엘프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린다.

‘오늘   처리해야   할   오후   업무가   뭐였더라?’

비록   연기에   불과할지라도   엘프는   테오라드의   노예였음으로,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셈이었다.   그런데   오늘   하비드가   지시했던   업무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비드는   매일   아침   사용인들과   노예를   집합시켜   업무를   지시하였지만(감기에   걸려   앓아누운   지금에서도   그건   잊지   않았다)   엘프는   그때마다   한   귀로   흘려들으며   중정을   날아다니는   나비나   관찰하고   있었기에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뭐…….   상관없나.’

노예에게   시킬   일이라곤   어차피   한정되어   있다.

대부분   저택의   청소나   앞뜰의   꽃에   물을   주는   것에   불과하였으니   관련해서   일을   하면   될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몇   걸음   나아가는데,   복도의   모서리에서   익숙한   인영이   걸어나왔다.

새하얀   사제복을   입고   청색의   영대를   목에   걸친   남자,   레비함이었다.

“저,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눈살이   찌푸려진다.   이야기?   지금   누가   누구한테   말을   청하고자   하는   것인가.

“비켜.”

그러나   레비함은   물러나지   않았다.

두   눈에   이상한   확신을   가진   채   버티고   있는   모습이   짜증스럽게   다가온다.

“당신,   노예가   아니지   않습니까?   떳떳한   일은   아니지만   집무실에서의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테오라드   가주님이   모종의   약점을   잡고   당신을   협박하고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이   녀석이   왜   이러는   걸까.

경거망동   하지   말라고   경고를   전해줬는데도   집무실의   대화를   엿듣고   혼자   이상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죽여달라는   건가?’

자살을   희망하고   있는   건지   의심되어   가만히   노려보자,   레비함이   진지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누구를?   나를?

하도   어이가   없어서   눈을   크게   뜨니,   레비함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래봬도   한   교구를   책임지고   있는   주교입니다.   교단   본부에   당신의   이야기를   전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테오라드   가주님의   협박도   해결할   수   있겠지요.”

“하…….”

“그   대신   테오라드   가주님이   저희   교단을   향해   계획하고   있는   흉계를   알려주십시오.   마녀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도   말씀주시면   좋겠습니다.   해당   정보를   전해주신다면   빛의   신   카라티아스님의   이름을   걸고   지켜드리겠습니다.”

귀찮다.   귀찮은   걸   뛰어넘어서   상당히   거슬리는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일전에   왔던   이단   심판관과   같은   꼴로   만들어버릴까.   잠시   고민하던   엘프는   미약한   흥미가   마음속에서   고개를   치켜드는   것을   느꼈다.

‘이거…….’

어쩌면   눈앞의   성직자를   이용해서   테오라드를   골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독한   체벌’을   운운했으면서   맥없이   매도를   끝내버린   테오라드에게   짜증이   났었는데,   성직자를   체스말로   이용해서   잠시나마   재미를   보고   싶어졌다.

“좋아.”

엘프가   레비함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네   계획을   말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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